[김탁환의 컬처플러스]드라마형 뮤직비디오의 잔혹성

  • 입력 2002년 1월 27일 17시 51분


오늘도 힘든 하루였습니다. 카푸치노 한 모금 입에 물고 소파에 기댄 채, 감미로운 음악과 멋진 영상으로부터 위로 받기 위해 음악채널을 찾습니다.

높고 여린 조수미의 목소리가 귓가를 울리네요. ‘나 가거든’입니다. 허준호가 이끄는 낭인들에 맞서 정준호가 홀로 검을 휘두르는군요. 무협 영화의 한 장면처럼 낭인들이 멋지게 쓰러집니다. 정준호 옆구리에 화살이 꽂히고 피가 흥건하게 배어납니다. 장총이 불을 뿜자 결국 무릎을 꿇네요. 쓰러지지 않으려 칼날을 움켜쥐는 오른손이 확대됩니다. 손바닥에서 주르륵 흘러내리는 더운 피.

이번에는 신비라는 신인 그룹의 노래 ‘투 마이 프렌드’가 흘러나오는군요. 신화의 맴버 전진이 세 여신을 지키는 무사로 등장하네요. 검은 복면의 자객들이 그들의 행복을 빼앗으려 합니다. 정준호처럼 전진도 혼자서 자객들과 맞서지요. 멋진 칼싸움 장면이 이어지다가 전진이 쓰러지고 세 여신마저 살해당합니다. 숲에 나뒹구는 네 구의 시체를 보여주며 노래는 허무하게 끝이 나는군요.

루이의 노래 ‘루’는 또 어떤가요. 연인 사이로 출연한 고수가 하지원을 공항까지 배웅합니다. 이륙한 비행기는 날개가 부러지며 추락하기 시작합니다.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상황이 가감 없이 그려지는군요. 아이를 안은 어머니, 통곡하는 남편. 하지원은 사랑하는 이에게 마지막 선물로 그림을 그립니다. 노래가 끝나자 이 일이 1985년 8월 12일 일본에서 일어난 실화라는 자막이 올라옵니다.

20분도 채 되지 않는 동안 500명도 넘는 사람이 죽어나갔네요. 1분에 25명 꼴이니, 너무 빠르고 너무 쉽게 죽음을 목격한 겁니다. 높은 인기만큼이나 지나친 폭력으로 비판받던 ‘첩혈쌍웅’ 같은 영화를 서너 편 본 느낌입니다.

남녀의 사랑과 이별을 다루는 것이 발라드이고, 그 이별의 극단적인 형식이 사별(死別)이겠지요. 같은 하늘 아래 살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하다는 조하문의 노래에는 재회의 기대가 숨어 있습니다. 죽음은 이 모든 가능성을 앗아가 버리지요. 슬픔은 증폭되고 고통은 끝이 없답니다. 연인의 죽음은 뮤직비디오에서 닳고 닳은 소재입니다. 김범수의 ‘하루’에서도 지진희와 송혜교가 차례차례 비행기 폭발로 죽지요. 그 장면 역시 끔찍하기는 마찬가지지만, 충분한 배경 설명과 사실적인 갈등의 설정을 통해 애틋하고 안타까운 사랑의 필연성을 만들어냅니다.

지금 내 앞을 뒹구는 이 대책 없는 죽음은 ‘하루’의 애잔함과는 거리가 있지요. 한꺼번에 여러 명이 죽어나가는 것은 예외로 두더라도, 천편일률적으로 죽음 자체를 피로 덮는 경향은 우려할 만 합니다. 혹시 이 뮤직비디오의 감독들은 자극과 재미의 수단으로 ‘잔혹한 죽음’을 끌어들이는 것은 아닐까요. 예전의 뮤직비디오에서 현란한 춤과 야한 옷이 맡았던 역할을 피와 눈물이 대신하는 것은 아닐까요. 이 경우 슬픔에 이르는 여정은 액세서리처럼 간략히 지나가고, 죽음 그 자체의 처참함만 부각되지요. 짧은 시간에 드라마 한 편을 담다 보니 어쩔 수 없이 몇몇 부분을 생략하게 되었다는 것은 핑계입니다. 죽음에 이르는 과정을 그릴 시간은 부족하다면서, 죽음의 광경은 왜 그토록 오랫동안 꼼꼼히 보여주는 것일까요.

채널을 돌리려는데 이수영의 신곡 ‘그리고 사랑해’가 눈길을 끕니다. 이번에는 김석훈과 이가흔의 사랑이네요. 인도를 걷던 김석훈은 뒤에서 오던 자전거에 우연히 부딪혀 우연히 차도로 쓰러지고 또 우연히 달려오던 트럭에 받혀 죽게 됩니다. 아스팔트에 가득 고인 피, 죽음의 경련. 잠시 고개를 돌렸다가 다시 보아도, 김석훈은 여전히 피를 흘린 채 떨고 있습니다. 이 몸서리쳐지는 장면은 김석훈의 손에 쥐어져 있던 비디오카메라에 담겨 노래가 끝날 무렵 다시 나오네요. 갑작스럽게 연인을 잃은 슬픔을 극대화시키려는 의도였는지는 모르겠으나, 이 노래도 결국 피비린내를 풍기며 끝이 납니다.

소설가 양귀자는 슬픔이 힘이 된다고 했고, 시인 허수경은 슬픔만한 거름이 어디 있겠느냐고 했지요. 슬픔이 힘이 되고 거름이 되기 위해서는 그 슬픔이 자신의 삶을 살피고 반성하는 하나의 계기가 되어야만 합니다. 오늘 본 뮤직비디오에 담긴 슬픔은 인생을 반추하게 만들기보다 감각적 고통만 확장시키네요. 지독한 장면만 잔뜩 보여주고 그 뒤의 불편한 기분을 수습하지 않는군요.

꼭 이렇게 맞아 죽고, 얼어 죽고, 칼에 찔려 죽고, 차에 받혀 죽고, 총에 맞아 죽고, 불에 타 죽어야만 하는 걸까요. 멋진 영상을 만들어내는 드라마틱한 슬픔 말고, 내 일상의 이 작고 보잘 것 없는 슬픔은 어디서 위로 받을 수 있을까요. 텔레비전을 끄고 라디오를 켭니다. 양희은의 ‘사랑, 그 쓸쓸함에 대하여’가 흘러나오는군요. 정말, 정말 쓸쓸한 밤입니다.

소설가·건양대 교수tagtag@freecha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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