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탁환 정재승 소설 ‘눈 먼 시계공’]<145>

  • 입력 2009년 7월 27일 13시 34분


드디어 결승전이 시작되었다.

최볼테르와 글라슈트 팀으로선 정말 꿈 같은 순간이다. 불과 몇 달 전, 무사시와의 친선경기에서 무차별 공격을 받으며 굴욕적으로 패했을 때만 해도, 이번 대회에서 16강에라도 들 수 있을까 걱정했었다. 글라슈트의 예상 밖 선전은 로봇격투 팬이나 도박사들에게 큰 충격을 안겼다. 사실 글라슈트의 이번 대회 출전은 부족한 연구비 마련을 위해 무리하게 강행된 측면이 있었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이었지만, 글라슈트가 이렇게 잘 싸울 줄은 연구소 그 누구도 몰랐다.

결승전이 시작되기 2시간 전. 볼테르는 상암동 경기장에 도착했다. 보르헤스와 세렝게티를 점검실에서 내보낸 후, 글라슈트와 둘 만의 시간을 잠시 가졌다. 이럴 때 그에게 글라슈트는 친구이자 아들이자 연인이었다. 글라슈트는 매서운 눈으로 늠름하게 서 있었다.

"글라슈트, 여기까지 오느라 고생 많이 했다. 그 동안 넌 놀라운 능력을 보여주었다. 내가 생각한 것 보다 훨씬. 네가 오늘 무사시를 무너뜨리면 우리에겐 엄청난 기회가 주어진다."

볼테르는 글라슈트의 허리를 잡으며 이렇게 말했다.

"서사라, 보르헤스, 세렝게티 그리고 노민선. 우리 팀은 오늘을 위해 지금까지 달려왔다. 우리의 노력은 오늘 이 결승전으로 마무리된다. 놀라운 능력을 보여다오."

볼테르는 글라슈트의 가슴을 뜨겁게 쓰다듬었다.

경기 때마다 볼테르는 당혹스러운 표정을 감추느라 바빴다. 글라슈트가 상대 로봇을 어떻게 죽음으로 몰아넣는지, 그도 그 비법을 정확히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볼테르는 시합 전에 수백 가지 공격 방법과 전술을 프로그래밍 하여 글라슈트 중앙제어시스템에 넣어두었다. 하지만 경기 흐름에 맞게, 상대로봇의 위치와 자세, 상태에 따라 그 공격 방법과 전술을 매 순간 적절히 선택하여 시합을 풀어가는 것은 전적으로 글라슈트의 몫이다.

대회 초반, 글라슈트가 상대방을 누를 때는 프로그래밍 된 공격 방법을 이 로봇이 적절히 응용한 결과처럼 보였다. 그러나 시합을 거듭할수록 글라슈트의 공격 방법이 점점 불안정해졌고 또한 진화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가 프로그래밍한 방식과는 달라지면서 새로운 스타일을 만들어간다고나 할까.

"로봇 시청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이곳은 잠시 후 '배틀원 2049' 결승전이 열릴 상암동 로봇격투기 전용경기장입니다. 저희 <보노보>에서는 '배틀원 2049'의 모든 경기를 실황으로 생중계해 드리고 있는데요, 이제 15분 후면 여러분이 그토록 기다리시던 결승전. '글라슈트 대 무사시' '무사시 대 글라슈트'의 숨 막히는 격투가 벌어집니다. 오늘 이 시간, 결승전 해설을 위해 로봇 해설위원 미르코 크로캅씨 나와 계십니다. 안녕하세요?"

스포츠 캐스터 정훈일의 속사포 같은 인트로가 경기의 긴박감을 더했다.

"네, 안녕하세요? 미르코 크로캅입니다. 오늘 이곳 상암동 로봇 격투 경기장 열기는 정말 뜨겁네요."

"그렇습니다. 정말 발 디딜 틈 없이 빼곡하게 모인 관중들, 이번 결승전을 보기 위해 세계 다양한 도시에서 로봇격투애호가들이 몰려왔지요. 근사한 경기가 될 것 같습니다."

경기 시작 3분 전, 무사시와 글라슈트가 격투 스테이지에 들어섰다. 글라슈트의 발걸음은 조금 무거워보였다. 서로 마주보는 자세로 경기가 시작되길 기다렸다. 양측 기술팀이 격투 스테이지 밖으로 나오고 둘만 남겨졌다. 두 로봇은 서로의 눈을 쳐다보지 않은 채 가만히 서 있었다. 그들에겐 '긴장감'이란 모드가 없었지만, 관객석과 격투 스테이지엔 당장이라도 터져 버릴 풍선처럼 팽팽한 긴장감이 맴돌았다.

"네, 말씀드리는 순간, 결승전. 그 '황홀한 경기'가 시작됐습니다."

경기 시작 음이 들리기가 무섭게, 두 로봇은 엄청난 순간가속으로 돌진하여 1미터 이상 점프한 후 상대로봇을 가슴으로 들이받았다. 엄청난 굉음이 경기장을 울렸다. 둘의 힘겨루기가 시작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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