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큰바람 불고 구름 일더니<253>卷四. 흙먼지 말아 일으키며

  • 입력 2004년 9월 9일 18시 5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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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박순철
그림 박순철
펼침과 움츠림(6)

<한왕 유방의 장수 중에 스스로 한(韓)나라 태위(太尉)라 일컫는 신(信)이란 자가 대군을 이끌고 무관을 나왔습니다. 과인을 죽여 팽성에서 죽은 전 한왕(韓王) 성(成)의 원수를 갚고, 과인의 땅을 뺏어 옛 한나라를 되일으키겠다는데, 그 기세가 여간 사납지 않습니다. 이제 있는 대로 군사를 긁어모아 양성(陽城)어름에서 막아보려 하나 아무래도 한신(韓信)의 기세에 미치지 못하는 듯해 걱정입니다. 옛말에 이르기를 입술이 없어지면 이가 시리게 된다 했습니다. 대왕과 과인은 봉지(封地)가 이어져 있어 서로 의지하는 이치가 이와 입술 같다 할 수 있습니다. 부디 한 갈래 군사를 보내시어 과인과 한나라를 도와주시고, 아울러 머지않아 대왕께 닥칠 앞날의 근심을 미리 없애도록 하십시오.>

하남왕 신양은 한왕 정창의 그 같은 글을 받자 온 몸에서 힘이 죽 빠졌다. 그런데 다시 기막힌 소식이 들려 왔다. 팽성으로 보낸 사자가 한군(漢軍)에게 사로잡혀 귀를 베이고 돌아온 일이었다.

신양은 실로 막막했다. 관중의 심상찮은 움직임에 손을 쓴다고 썼는데도, 하루아침에 외로운 섬처럼 한나라 대군에 에워싸인 처지가 되고 만 까닭이었다. 그것도 빠른 구원조차 바랄 수 없게 되었으니, 스스로 둘러보아도 그 모든 일이 도무지 실감나지 않았다.

그런데 알 수 없는 일은 낙양성을 에워싼 한군의 움직임이었다. 무엇을 기다리는지 이틀이 지나도록 화살 한 대 날려 보내지 않았다.

“어찌된 셈인가? 한군은 어찌하여 이틀이 지나도록 가만히 우리를 바라보고만 있는가?”

사흘째 되는 날 아침 신양이 몇 안 되는 장수들을 불러 놓고 물었다. 그 까닭이 궁금하기는 장수들도 마찬가지였다. 이런저런 추측으로 군신(君臣)이 함께 궁금함을 풀어보고 있는데, 갑자기 문루(門樓)쪽을 지키던 장수에게서 급한 전갈이 왔다.

“어떤 사람이 문루 앞에서 대왕께 뵙기를 청합니다.”

“그게 누구라더냐?”

신양이 전갈을 가지고 온 군사에게 물었다. 그 군사가 들은 대로 대답했다.

“조(趙)나라에서 온 장(張) 아무개라 하였습니다.”

신양은 그게 누군지 얼른 알 수는 없었으나, 같은 고향 사람이라는 바람에 만나보기로 했다. 그런데 문루 위에 나가 보니 옛 주인 장이가 말 등에 높이 앉아 있는 것이 아닌가.

“대왕께서 어인 일이십니까? 어찌하여 이렇게 오셨습니까?”

신양이 놀라 두 손을 모으며 장이에게 그렇게 물었다.

신양도 장이가 진여에게 나라를 뺏긴 일은 소문을 들어 알고 있었다. 하지만 말할 것도 없이 장이는 팽성으로 달려가 그 일을 알리고, 패왕의 힘을 빌려 원수를 갚을 줄 알았다. 아니면 적어도 제나라와 조나라의 반역을 다스리려고 패왕이 일으킨 대군의 선봉이라도 되어야 마땅했다. 그런데 난데없이 한왕 유방의 대군 속에 섞여 왔으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하남왕은 그간 별고 없으셨는가? 내 오늘은 특히 하남왕에게 권할 일이 있어 왔네.”

장이가 옛 주인의 정을 담아 그렇게 말했다. 신양도 지난날의 공손함을 잃지 않고 받았다.

“어떤 경위로 이리 오시게 되었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대왕께서는 제 일생의 은인이십니다. 무슨 일인지 말씀하십시오.”

글 이문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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