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오래된 정원 (288)

  • 입력 1999년 12월 3일 19시 15분


방문자는 단추를 누르고 인터폰으로 자기를 밝히고 안에서 버튼을 눌러 주면 철문에 달린 작은 쪽문이 열려요. 문 바로 옆에 불을 켜는 낡은 쇠 장식의 스위치가 있어요. 그걸 누르면 어두운 통로와 안의 뜰에서 현관까지 일렬로 늘어선 외등이 켜졌다가 천천히 걸어서 현관 문을 열고 건물에 들어설 때 쯤에 불이 저절로 나가요. 현관으로 들어서면 일 층의 방문들이 사방으로 보이고 가운데 공간에는 삼 층의 꼭대기까지 휑하니 뚫려 있어요. 이 공간 속에 둥근 기둥이 서 있고 나선형의 철제 층계가 덩굴나무처럼 감고 올라가요. 삼 층이라고는 해도 한 층이 다른 건물의 두 배 높이는 되니까 육 층인 셈이에요. 나는 이 층계가 시작되는 층계참 옆에 붙어 있는 전원 단추를 누르고 올라가기 시작합니다. 맨 손으로 올라갈 때에는 발걸음이 가벼워서 내 방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설 때까지 불이 켜져 있지만 장을 보고 돌아올 때 조금만 지체해도 불은 사정없이 꺼져 버리고 말아요. 그러고나면 벽을 더듬으며 올라가 다음번 모퉁이에서 벽을 더듬어 다시 단추를 눌러야만 합니다. 글세 전기를 얼마나 아낀다고 이런 호들갑을 떨게 만들어 놓았는지.

내 방문을 열면 전에 살던 사람이 머리 위로 높은 천장이 보이는게 싫어서 그랬는지 휘장을 쳐놓았어요. 흰 바탕에 푸른 갈매기 무늬가 찍힌 캔버스 천이에요. 현관 앞의 공간에는 신이나 우산이나 코트를 넣을 수 있는 붙박이 수납장이 있어요. 방으로 들어가는 문짝 없는 문에는 커튼이 양갈래로 늘어져 있어요. 이런 것도 전에 있던 것들이에요. 천장이 아득하게 보이는 앞쪽은 전면 창인데 흰 무명 커튼이 늘어져 있지요. 아랫편의 작은 창들을 밖으로 밀어서 열 수가 있고 윗편의 크고 길다란 창들은 붙박이에요. 에치 빔이 무지막지하게 지나가는 천장은 그런대로 볼만해요. 갓을 씌운 스튜디오 식의 전등이 매달려 있어요. 그리고 방의 삼분의 일쯤 공간을 차지하고 로프트가 선반처럼 달려 있구요 가운데에 좀 가파른 사다리가 놓였습니다. 사다리를 타고 로프트에 오르면 거기가 내 침실인 셈이에요. 낮은 침대 하나가 놓였고 키 작은 스탠드와 속옷을 넣는 서랍장 하나가 전부예요. 나는 휑하니 비어 있는 오른쪽 공간에 낮은 책장을 올려 놓고 읽을만한 책들을 두었어요. 침대에 업드려 잠들기 전에 책을 읽곤 했지요. 로프트 밑에는 긴의자 하나, 피서지에서 쓰는 접었다 폈다 하는 긴 천이 달린 의자 둘, 그리고 소파 침대 하나가 있었구요. 방 왼쪽에 둥근 식탁과 나무 의자 둘, 책상과 걸상, 그리고 큰 나무 이젤과 중간치 이젤이 있었어요. 창쪽의 벽 가운데에 라디에이터 모양의 가스 난로가 붙어 있어요. 늘 촛불만한 불꽃이 남아 있는데 발브를 열면 불꽃이 좌우로 길게 퍼지면서 열판이 달아 올라요. 방의 오른편 벽에는 큼직한 붙박이 장이 있구요 왼편에는 부엌으로 들어가는 문이 있어요. 부엌 문을 열자마자 전기 온수 탱크가 달린 화장실겸 샤워실이 있고 작은 창이 있어요. 창으로 아래를 내려다 보면 소나무며 자작나무며 은행나무가 섰는 안뜰이 내려다 보입니다. 창 바로 앞에 잎이 무성한 칠엽수는 봄꽃이 필때마다 바람에 불린 꽃잎이 내 방안에 날아들곤 했어요. 이 작은 창 앞에 일인용의 함석판으로 만든 작은 탁자와 등받이 없는 의자가 있었는데 나는 주로 여기서 간단한 요기를 하면서 마로니에라는 서양 이름을 가진 칠엽수 나무와 친해졌어요.

<글:황석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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