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여자의 사랑(75)

  • 입력 1997년 3월 21일 08시 15분


가을이 깊어지는 동안 〈30〉 어쩌면 여자 앞에 그가 말을 아끼고 있는 것도 행여 다시 나오게 될지 모를 과거 이야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럴 경우 언제까지 입을 열지 않을 수도 없는 일이었다. 『처음엔 그냥 그 사람이 맞나 안맞나 알아만 보고 싶었어요』 여자는 자신이 그를 알아본 이야기를 했다. 오빠가 말한 사람의 이름과 학교를 확인하고, 거처를 확인했다고 말했다. 『그런데요?』 처음으로 그가 여자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그 말을 되받듯 물었다. 『다른 뜻은 없었어요. 저는 예전의 그 기억을 늘 내 어느 한 시절에 꾸었던 꿈처럼만 여겨왔어요. 사실 그 쪽에 대해 알고 있는 것도 꿈처럼 어렴풋하게 기억하고 있는 이름밖에 없었던 거구요. 얼굴도 오늘 다시 보기 전까지는 제대로 그려 낼 수 없을 정도로…』 그건 그도 마찬가지였다. 예전의 기억으로는 여자의 얼굴은 물론 그때 여자의 전체적 모습에 대해서 무어라고 말할 수 있을 만큼 확실하게 머릿속에 넣어두고 있던 부분이 없었다. 여자의 말대로 그도 내 자신이 실제 그때 그런 일을 겪었던 게 아니라 꿈 속에서 그런 일을 겪었던 게 아닌가 하고 생각할 정도였다. 아주 잊었다면 거짓말이지만 그녀에 대해 작은 것 하나 무얼 기억하거나 각인하고 있는 것은 없었다. 다만 꿈속만 같았던 그날 밤의 성합만 지나가는 바람처럼 언뜻언뜻 떠오르며 오래오래 그의 뇌리에 남아 있었던 것이었다. 그래서 그녀의 얼굴에 대해 입은 어떻고, 코는 어떻고, 또 그것의 전체를 이룬 얼굴 모습이 어떠했는가를 기억을 복원하듯 그려낼 수는 없지만 그 얼굴의 전체적 이미지만은 그때 자신의 몸 아래에 누워 반쯤 감은 듯 가늘게 뜨고 자신을 올려다보던 여자의 눈과 함께 오래도록 그의 가슴 속에 남아 있었다. 그러나 그때 그 일 이후, 한 번도 여자를 다시 봤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었다. 그냥 한 슬픈 여자와의 아주 특별한 운명과도 같은 인연이라고만 생각했다. 그리고 여자 역시 그렇게만 자신을 생각해 주길 바랐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것으로 여자가 자신의 과거로부터 벗어나 주길 바랐다. 『오빠라는 사람도 내가 이곳에서 학교를 다니는지 알고 있습니까?』 『예』 여자는 그 말을 한참 뜸을 들였다가 대답했다. 『그러면 남다른 생각도 들겠군요. 그쪽 입장에선…』 그 말에 여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글:이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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