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경란의 사물 이야기]슬리퍼

  • 동아일보
  • 입력 2016년 12월 28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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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말까지 약속이 몇 개 있으니 머리를 짧게 자르지 말고 다듬어 달라고 하자 헤어숍 주인이 송년 모임이냐고 물었다. 그렇기도 하고 생일이 아직 안 지나서라고 말꼬리를 흐렸다. 사각사각, 내 머리칼을 자르면서 아주머니는 어렸을 때 어머니가 돌아가셔서 그런지 자신의 생일이 되면 유난히 엄마 생각이 난다고 했다. 만약 살아계셨다면 생일에 엄마한테 선물을 드렸을 것이라고. 무슨 선물을요? 지금껏 내 생일에 엄마에게 선물을 드려 본 적이 없는 나는 그렇게 되묻지 않을 수 없었다. 낳아주셔서 고맙다고요. 늘 너무 수다스러워서 헤어숍을 옮길까 말까 고민하게 만드는 주인아주머니는 머리를 다 자를 때까지 그 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한 달 전인가, 시내에 나갔다가 유니클로에 들렀다. 실내용 슬리퍼를 고르는데 엄마 생각이 났다. 관절이 안 좋은 데다 기온이 내려가면서부터는 발가락까지 마디마디 시린 것 같다는. 그날 두툼하고 푹신푹신한 초록색과 빨간색 체크무늬 슬리퍼 두 개를 사갖고 와 엄마에게 한 켤레 드렸다. 생각해 보니 엄마께 드린 선물이라면 그게 가장 최근의 것이고, 슬리퍼라면 나도 선물을 받은 적이 있었다.

 2년 전 이맘때 로마의 오래되고 추운 숙소에서 지냈다. 사피엔차 대학에서 한국문학으로 논문을 쓰던 이탈리아 학생과 가깝게 지냈는데 어느 날 점심을 먹는 자리에서 종이로 둘둘 만 꾸러미를 내게 주었다. 몇 번인가 내 숙소에 와 본 적이 있던 그녀 눈에 거실의 차가운 돌바닥이 마음에 걸린 모양이었다. 종이엔 부직포로 만든 슬리퍼 한 켤레가 싸여 있었다. 그 후 그녀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이 있을까, 만날 때마다 눈여겨보게 되었다. 로마를 떠나기 전날 3개월 동안 읽었던 한국 소설과 시집들을 모두 그녀에게 주었다. 선물이라고 새로 산 것은 하나도 없어서 그녀가 그 책들을 받고 좋아하던 표정을 더 잊을 수가 없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주는 것보다 누군가에게서 받는 것이 항상 더 많은” 거라고, 그러한 선물에 관한 이야기들을 모아 놓은 가쿠타 미쓰요의 ‘프레젠트’라는 따뜻한 책이 떠오른다. 아마도 우리는 지금은 잊어버린, 수없이 많은 선물을 받으면서 자랐고 나이 들어가는 것일 테지.

 빨간색 체크무늬 슬리퍼를 신은 엄마가 청소를 하느라 거실을 왔다 갔다 하는 게 보인다. 그 9900원짜리 슬리퍼를 사면서 실은 기분이 조금 좋았던 것 같다. 받는 사람한테 꼭 필요한 물건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으니까. 생일까지 며칠 더 남았으니 일단 엄마에게 필요한 게 무엇인지 주의 깊게 살펴볼 생각이다. 그리고 송년모임에서 만날 사람들에게 주고 싶은 작고 쓸모 있는 ‘프레젠트’에 관해서도. 
 
조경란 소설가
#슬리퍼#유니클로#송년모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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