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우영의 영화와 심리학]레인맨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8월 29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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닫힌 마음 가진 우리들… 감동을 부르는 따뜻함이 그립다

여자친구와 캘리포니아 주 팜스프링으로 주말여행을 떠난 찰리(톰 크루즈). 그에게 한 통의 전화가 걸려온다.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것이다. 그는 바로 차를 돌려 자신이 태어나고 자랐던 집이 있는 오하이오의 신시내티로 향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고향은 따뜻한 공간이겠지만, 찰리에게 고향집은 따뜻함과는 거리가 먼 곳이다. 그에게 신시내티의 집은 차가운 기억으로만 남아있다.

찰리가 두 살이 되던 해에 그의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아버지는 엄격하고 냉정한 사람이었다. 찰리에게 아버지는 자식보다는 장미와 자동차를 더 사랑한 사람으로 기억에 남아있다. 아버지는 1949년형 뷰익 로드마스터 컨버터블을 가지고 있었다. 약 8000대만 생산된 8기통의 클래식 자동차. 아버지는 아들이 차에 손도 못 대게 했다.

16세 때 찰리는 거의 전 과목에서 A를 받았다. 자신의 성취를 아버지에게 인정받고, 친구들에게 자랑도 하고 싶었다. 그래서 아버지에게 한 번만 로드마스터를 몰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그러나 돌아온 대답은 단호했다. “노(No)!” 사춘기였던 찰리는 아버지의 자동차 열쇠를 몰래 훔쳐 친구 4명과 함께 자동차를 몰고 나간다. 그렇지만 얼마 가지 못해 경찰에 붙잡히고 만다. 아버지가 자동차 도난신고를 했기 때문이다.

다른 아이들은 부모가 보석금을 내서 그날로 모두 풀려났다. 하지만 찰리는 이틀 동안 유치장에 갇혀 있어야 했다. 아버지가 보석을 신청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사건이 있은 후 찰리는 아버지를 떠났다. 그 후로 아버지를 찾지도 않았고 연락도 하지 않았다. 물론 아버지도 마찬가지였다.

찰리, 친형을 만나다

장례식에 참석한 찰리의 얼굴에선 슬픔이라곤 찾아볼 수 없다. 아버지의 죽음을 알려준 친구나 여자친구는 찰리를 걱정하지만, 사실 그는 어떤 아픔도 느끼지 않는다. 그는 그냥 유언을 확인하려고 온 것뿐이다. 아버지는 찰리에게 뷰익 자동차와 장미를 물려주겠다고 했다. 그 외의 모든 재산, 그러니까 집을 포함한 300만 달러 상당의 유산은 다른 상속인에게 물려줬다. 장미, 장미라니. 찰리는 유언장의 내용을 듣고 아버지를 저주한다. 만약 지옥이라는 곳이 있다면 아버지는 거기에 있을 거라고. 그곳에서 지금 자신을 바라보면서 비웃고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찰리는 유산은 자신의 몫이라고 생각하고 유언장 속 300만 달러의 상속자를 찾아 나선다. 그 사람은 바로 레이먼드(더스틴 호프먼). 찰리의 친형이다. 찰리는 자신이 외아들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형이 있었던 것이다. 찰리의 기억 속에도 레이먼드가 희미하게 남아 있기는 하다. 찰리는 자신이 무서워할 때마다 노래를 불러주던 ‘레인맨’이 있었다고 생각하고 있다. 하지만 찰리는 레인맨이 자신의 상상 속에 존재하는 인물이라고만 생각했다. 찰리가 레인맨이라고 생각하고 있던 사람은 노래를 불러주며 아기였던 찰리를 달래던 친형 레이먼드였다. 찰리가 너무 어려서 레이먼드를 레인맨이라고 불렀던 것이다. 레이먼드는 자폐증 환자였다. 아버지는 찰리가 세 살 무렵에 레이먼드를 자폐증 환자들을 위한 시설로 보냈다.

“그는 사람에게 관심 없어요.” 레이먼드를 9년간 돌본 간호사가 그의 증상에 대해 말해준다. 자폐증의 가장 큰 특징은 타인과의 의사소통에 장애가 있는 것이다. 그 이유는 다른 사람들의 관점에서 세상을 보지 못하고, 보려고 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결국 사회적 상호작용이 불가능하고 동료관계를 형성하지 못하게 된다. 말 그대로, 자신만의 세상에 스스로 갇혀서 살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모두 ‘자폐 증상’을 앓고 있다

자폐증의 증상은 매우 다양하다. 아스퍼거 신드롬이라고 부르는 자폐증의 경우에는 특정 영역에서 매우 뛰어난 기술이나 재능을 보여주기도 한다. 대니얼 태밋이란 사람은 운전도 못하고, 왼쪽과 오른쪽도 구분하지 못한다. 하지만 그는 3.14로 시작하는 원주율(π·파이)의 2만2514개 숫자를 5시간 9분 54초에 걸쳐서 정확하게 기억해내 유럽 신기록을 작성하기도 했다. 레이먼드도 전화번호부에 나와 있는 사람들의 이름과 번호를 정확하게 기억할 정도로 엄청난 기억력을 보여준다. 하지만 문제는 정상적인 의사소통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자폐증과 관련해서 흥미로운 사실은 자폐증에 성차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자폐증은 여아보다 남아에게서 나타날 가능성이 약 4배나 더 높다. 영국 케임브리지대의 발달정신병리학자인 사이먼 배런코언은 자폐증은 극단적인 남성 두뇌를 타고났기 때문에 발생한다는 가설을 제시했다. 그에 따르면 남성은 체계화하는 두뇌를 가진 체계자(systemizer)로 태어난다. 남성은 대상을 규칙에 따라 지각하고, 수학적이며 기계적인 기준에 따라 분류하는 것에 특화된 두뇌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반면 여성은 공감하는 두뇌를 가진 공감자(empathizer)로 태어난다고 한다. 여성은 타인의 얼굴 표정과 제스처를 쉽게 읽어내는 두뇌를 가지고 태어나는 것이다.

수는 적지만, 남성들 중에도 공감자의 두뇌를 가지고 태어나는 사람도 있고, 여성들 중에 체계자의 두뇌를 가지고 태어나는 사람들이 있다. 문제는 체계자의 두뇌를 가진 두 명이 만나서 아이를 낳을 때 발생한다고 한다. 유사한 사람들끼리 매력을 느끼고, 짝을 맺는 경향 때문에 두 명의 체계자가 결혼하는 경우가 있는데, 아빠와 엄마 모두 체계자의 뇌를 가지고 있는 경우 아이는 극단적으로 남성적인 뇌를 가지고 태어날 확률이 높다. 즉, 공감하는 능력은 제로에 가깝고 규칙에 따라 체계적으로 분류하는 능력만 극도로 뛰어난 뇌를 가지고 태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를 감동시키는 것은 ‘따뜻한 마음’이다

레인맨에 등장하는 사람들 중에 자폐증으로 진단 받은 사람은 레이먼드뿐이다. 하지만 다른 사람의 감정을 이해하지 못하고 자신만의 관점으로 세상을 바라본다는 점에서는 찰리나 찰리의 아버지도 자폐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영화 ‘레인맨’은 체계자의 뇌를 가진 세 남자의 이야기처럼 보이기도 한다. 어쩌면 이 세 남자뿐만 아니라 우리는 모두 조금씩 자폐 증상을 가지고 있는지도 모른다. 다른 사람의 마음에 공감하지 못하고, 자신만의 관점과 논리만을 주장하면서 주변 사람들의 마음에 상처를 주기도 하니까 말이다.

찰리는 유산을 받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레이먼드와 함께 아버지의 유산인 뷰익 로드마스터를 몰고 대륙횡단 여행을 떠난다. 이 과정에서 찰리의 닫혔던 마음의 문이 조금씩 열린다. 여행의 출발은 자폐증 ‘환자’ 레이먼드와 함께 시작했지만, 여행의 끝에서 그는 ‘형’ 레이먼드를 발견하게 된다.

레이먼드는 놀라운 관찰력과 기억력을 보여준다. 그의 능력은 탄성을 지르기에 충분하다. 하지만 찰리를 감동시키고 그의 마음을 연 것은 어린 동생이 뜨거운 물에 델까 봐 걱정하고, 무서워하는 동생을 달래기 위해 노래를 불러주던 레이먼드의 따뜻한 마음이었다. 자폐증이었음에도 아기였던 동생을 보호하려 했던 레이먼드. 세상을 향해 굳게 닫혀있던 레이먼드의 마음도 아기였던 동생 찰리에게만은 열려 있었던 것이다. 결국 성인이 된 찰리의 닫힌 마음은 따뜻했던 레인맨의 추억 덕분에 열리게 된다. 다시 말하지만, 감탄을 자아내는 것은 유능함이나 뛰어난 재주지만 궁극적으로 우리를 감동시키는 것은 따뜻한 마음이다.

전우영 충남대 교수·심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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