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성예찬]<16·끝>디지털 시대, 물성이 중요한 이유는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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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2년 7월 13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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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인 대담… 광속 사회 피로감, 아날로그에서 위로받다

대담에 참여한 원재훈 민병일 마영범 씨(왼쪽부터)가 자신의 소중한 물건과 함께 사진을 찍었다. 원 씨는 30여년 전 구입한 정음사판 릴케 시집과 T S 엘리엇 시집을, 민 씨는 독일 벼룩시장에서 산 몽블랑 만년필과 돈키호테 조각상, 닭장 습도계와 편지 개봉 나이프를, 마 씨는 일본에서 산, 전통 종이를 활용한 조명기구를 ‘나의 물건’으로 꼽았다. 장승윤 기자 tomato99@donga.com
대담에 참여한 원재훈 민병일 마영범 씨(왼쪽부터)가 자신의 소중한 물건과 함께 사진을 찍었다. 원 씨는 30여년 전 구입한 정음사판 릴케 시집과 T S 엘리엇 시집을, 민 씨는 독일 벼룩시장에서 산 몽블랑 만년필과 돈키호테 조각상, 닭장 습도계와 편지 개봉 나이프를, 마 씨는 일본에서 산, 전통 종이를 활용한 조명기구를 ‘나의 물건’으로 꼽았다. 장승윤 기자 tomato99@donga.com
‘빠름, 빠름, 빠름’을 외치는 광고처럼 디지털 기기는 시간의 속도를 대변한다. 반면 아날로그 시대의 물건은 시간의 무게를 지닌다. LP 레코드, 수제 라디오, 보드게임판, 한지 등은 많은 이의 추억과 향수를 담고 있다. 올 상반기 동아일보 문화면에 연재한 ‘물성예찬’은 때론 예민하고 귀찮고 챙겨줘야 하는 물건이지만 다른 것으로 대체할 수 없는 질감과 향기, 그 물성(物性)에 매혹된 사람들의 이야기를 전했다.

새롭고 편리한 것이 최고의 가치가 된 이 시대에 오래되고 불편한 물건을 찾는 이유는 뭘까. 소수의 별난 취미일까. 아니면 그 감촉과 체취를 느끼고자 하는 인간 본능의 발현일까. 민병일 동덕여대 산업디자인학과 겸임교수(53)와 시인 겸 소설가인 원재훈 씨(51), 공간 디자이너인 마영범 SO 스튜디오 대표(55)가 모여 디지털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이 왜 물성을 좇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 시간의 속도 vs 시간의 무게

민병일=최근 아날로그 정서를 가진 물건과 그 성질에 열광하는 사람이 많아진 건 속도 위주의 디지털 문명에 대한 반감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대다수 사람이 아날로그 시대를 살다가 갑자기 디지털 시대를 맞았거든요. 두 문명의 충돌 속에서 사람들이 느끼는 괴리,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는 것에 대한 좌절 등이 아날로그를 대표하는 옛 물건에 대한 향수로 이어지고 있어요.

원재훈=예전부터도 타인과의 교류보다 골방 속에서 자신의 일에 몰두하는 사람들이 있었죠. 예술가들이 주로 그랬는데, 그들에겐 오디오 바늘이 LP판을 긁어내는 소리 하나도 특별한 의미가 됐어요. 그런데 디지털 시대가 되면서 골방 속에 갇혀 살면서 ‘외롭다’는 사람이 훨씬 많아졌죠. 지나친 경쟁은 이를 가속화했고요. 오히려 지금 옛 물건을 만지고 느끼면서 소통하는 욕구가 더 강해졌어요.

○ 디지털 시대엔 모두가 외로워

마영범=물성이 아날로그에만 존재하고 디지털에는 없다는 사고에는 동의할 수 없습니다. 다른 물성일 뿐이죠. 어찌 보면 디지털 기기가 촉감을 더 강조해요. 스마트폰의 터치감이 얼마나 중요합니까. 아날로그와 디지털이 가진 강점을 합치면, 즉 속도와 품질에 따뜻함까지 더하면 그것이 최고의 물성을 갖춘 물건인 거죠.

민=디지털 문화는 무한복제를 의미합니다. 반면 아날로그 시대의 물건은 그 자체가 원형입니다. 원형은 귀함을 뜻하죠. 귀함 속에는 인문주의와 장인정신, 심미성이 들어 있습니다. 그렇기에 낡고 불편하더라도 그 물성이 중요한 거지요.

마=저 역시 LP를 주로 듣습니다. (조건이 제대로 갖춰졌을 경우) 소리가 더 좋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평균적으로 따질 때 CD가 더 좋은 소리를 내죠. 즉 지직거리는 소리가 심해도 ‘아날로그적 감성이 좋다’는 이유로 LP를 들을 필요는 없다는 이야깁니다. 아날로그 물건이 진정한 의미를 가지려면 일상에서 즐길 수 있어야 하죠.

○ 물건과의 이야기가 중요

원=오래전 일기장과 책을 볼 때마다 가슴이 설렙니다. 오래된 종이와 펜으로 쓰거나 활판으로 새긴 글씨에서 느껴지는 감성 때문이죠. 제게는 파피루스나 죽간이 가진 가치처럼 느껴집니다. 그렇다고 해서 컴퓨터를 통해 일기나 전자책이 의미가 없다고 볼 순 없어요. 현대 사회의 특징은 다양성입니다. 아날로그적 물건과 디지털 기기는 그 다양성 범주 안에 함께 존재한다고 생각합니다.

민=몇백 년 전 만들어진 인상파 그림을 지금도 우리는 즐깁니다. 하지만 초현실주의 그림은 어려워하죠. 모든 것이 과하게 넘치는 시대에 단순하지만 고귀한 아날로그의 정신은 여전히 유효합니다.

원=물건 자체가 아닌 물건과의 이야기가 중요합니다. 물성을 느끼는 건 인간이니까요.

마=‘섹스가 마찰이잖아요.’ 거기서 에너지가 생기죠. 물성이 가지는 힘은 만지는 과정을 통해 교감하는 데 있어요. 그러면 화려한 디자인과 인간을 현혹시키는 브랜드를 다 거둬내고 물건의 본질을 읽을 수 있죠. 그러면 나만의 소중한 물건이 될 수 있어요. 그것이 바로 21세기 물성이 중요한 이유라고 생각합니다.

<대담자>

민병일
시인. 동덕여대 산업디자인학과 겸임교수. 독일 유학 시절 라디오, 몽당연필, 주전자 등 사람들의 손때가 묻은 물건들을 수집. 그 내용을 묶어 ‘나의 고릿적 몽블랑 만년필’을 펴냄.

원재훈
시인이자 소설가. 다방면에 자유로운 글쓰기를 실천. 국악방송에서 책 프로그램인 ‘행복한 문학’ 진행. 등잔, LP 수집가.

마영범
공간 디자이너. SO 스튜디오 대표. 의상 디자이너 이영희 씨 매장, 오설록 티하우스, 배상면주가 등을 꾸밈.

이지은 기자 smiley@donga.com
#디지털 시대#물성#대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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