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2/기물명(器物銘)을 찾아서]책 읽은 횟수 표시한 서산… 책갈피로도 쓰인 선비의 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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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1년 9월 3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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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산(書算)은 두 층으로 혀나 귀 모양의 홈을 만들어 그것을 접었다 폈다 하며 책 읽는 횟수를 센다. 보통 아랫단 다섯은 한 자리 숫자를, 윗단은 십 단위 수나 백 단위 수를 나타낸다. 호림박물관 제공
서산(書算)은 두 층으로 혀나 귀 모양의 홈을 만들어 그것을 접었다 폈다 하며 책 읽는 횟수를 센다. 보통 아랫단 다섯은 한 자리 숫자를, 윗단은 십 단위 수나 백 단위 수를 나타낸다. 호림박물관 제공
“연날리기 마치고서 숨을 씩씩대며, 처마 끝 고드름 한 가닥을 잘라먹네. 웬일이냐 책상 앞에선 기침만 콜록콜록, 책 읽는 소릴랑 파리 소리 같으니…(鳶罷氣騰騰 吃却端一股氷 歸對書床無盡嗽 讀聲出口只如蠅).”

18세기의 시인 유득공이 지은 ‘연 날리는 꼬마(飛鳶童子)’란 시다. 서당 다니는 꼬마를 묘사한 것인데 표현이 해학적이다. 연 날릴 때는 기세등등하던 녀석이 책상 앞에 앉았다 하면 목소리가 기어들어간다. 김홍도의 그림 ‘서당’ 풍경에 나오는 댕기머리 꼬맹이들도 이랬을까.

필자도 어릴 적에는 할아버님을 모시고 친구들과 글을 배웠다. 글 읽는 시간은 한 번에 보통 1시간 반쯤. 무릎이 저리도록 꿇어앉아 낭랑한 소리를 내야 했다. 가을, 그리고 추석이 다가온다. 웬일인지 수염을 쓰다듬으며 책 읽는 소리를 들으시던 할아버님이 유독 그리워진다.

○ 글 읽는 횟수를 어떻게 알까?

소리 내어 글 읽는 것이 낭독이다. 낭독은 미덕이 많았다. 마당에서 벼 말리던 아버지는 글 읽는 소리로 자식이 조는지 공부하는지를 금방 알았다. 문자 교육을 제대로 못 받은 부인들은 남편과 아들의 글 읽는 소리에 덩달아 글공부를 했다. 서당 개도 삼년이면 풍월을 읊는다 하지 않았던가.

옛 사람들은 같은 책을 여러 번 되풀이해 읽어 그 뜻을 머릿속에 새기려 했다. 한데 책 읽은 횟수는 도대체 어떻게 알 수 있었을까. 절하는 횟수는 염주로 알고 숫자의 계산은 주산(珠算)으로 알듯, 책 읽는 횟수는 서산(書算)으로 알 수 있었다.

서수(書數)라고도 불린 이 물건은 종이 두 겹을 맞대어 긴 젓가락 봉투처럼 만든 것이다. 한쪽 면에 홈을 내 귀나 혀 모양을 만들고, 이 귀(혀)를 접었다 폈다 하면 책을 읽은 횟수를 헤아릴 수 있다. 즉 접었다 펴는 부분은 일종의 눈금 역할을 했다. 서산 위에는 여러 개의 눈금이 있었다.

때론 표면에 비단을 입히거나, 혹은 색깔을 칠해 멋을 부릴 수도 있었다. 서당의 꼬마나 궁중의 궁녀, 평생 글만 읽은 남산골샌님 등 각계각층의 사람들이 서산을 가지고 글을 읽었다. 같은 글을 수천 번까지 읽었던 선비들에게 서산은 독서의 필수품이었다. 서산은 책장 사이에 꽂으면 책갈피가 되기도 했던 어여쁜 물건이었다.

○ 서산 이야기 두 가지

18세기의 명필 이형부(李馨溥)는 어느 가을날 책을 꺼내어 말리다가 해묵은 책을 한 권 발견했다. 어릴 적 외가에서 공부를 하고 친가에 돌아올 때 외삼촌이 손수 필사해 선물한 ‘효경(孝經)’이었다. 노년에 접어든 그의 추억 속에서, 장가든 외삼촌은 날마다 외할머니를 찾아와 재미나는 이야기를 들려주었고, 자기를 특히 귀여워하여 글씨 쓰는 법도 가르쳐주었다. 하루는 외삼촌이 “귀중한 물건이니 절을 올려라” 하고 뭔가를 선물했는데, 그게 바로 외삼촌이 직접 만든 서산이었다.

이형부는 외삼촌이 직접 써준 ‘효경’을 발견하고 감동과 추억에 젖어들다 문득 깨닫는다. 외삼촌이 하필 효도의 경전인 ‘효경’을 써주었던 이유를, 인생에서 기예나 학문 행실 등 다른 무엇보다 효도가 더 소중하다는 그 뜻을 말이다. 아쉽게도 이형부가 외삼촌에게 선물 받았던 서산이 ‘효경’ 책갈피에 남아 있었는지는 그의 글에 남아 있지 않다.

그런데 비슷한 시대의 문관 강필신(姜必愼)은 다 떨어진 서산을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하다가 짤막한 수필을 남겼다. 그는 10년 전에 자신이 직접 만든 서산으로 수백만 자의 글을 읽었다. 마침 중국 당나라 때 문인 한유(韓愈)가 쓴 묘지명(墓誌銘)을 읽어가던 참에 서산이 너덜너덜해지고 말았다. 그는 ‘버리고 새로 만들어야지’ 하다가 망설이지 않을 수 없었다. 읽어 나가던 한유의 글 때문이었다. 한유의 친구인 이관(李觀)이 남에게 빌린 벼루를 4년째 쓰고 있었는데, 이 벼루를 옮기던 사람이 실수로 깨뜨리고 말았다. 이관은 벼루를 상자에 담아 당나라 수도 장안의 어떤 마을에 묻어주었고, 이를 본 한유가 그 사연을 글로 남겼다.

‘이 서산은 내가 직접 만들었으며, 10년간 독서의 동행이 되지 않았던가? 원래 땅에서 나온 벼루야 땅에 묻는 것이 마땅하지만, 서산은 대체 어디에 묻어야 하나?’

그런 고민 끝에 강필신은 서산을 다시 책갈피에 꽂아두었다. 종이로 만든 서산이니 책으로 돌아가 묻히는 것이 마땅하다며 말이다.

○ 서산명(書算銘)은 없는가?

기록에는 어머니가 서산을 만들어 줬다거나, 고인(故人)의 책 속에서 서산을 발견했다거나 하는 일이 이따금 나온다. 효종(孝宗)이 읽던 책 속에서 서산이 나오자 후대의 신하들이 감격해했던 것이나, 자식 교육에 엄했던 민씨 부인이 훗날 대학자가 된 아들 이재(李縡)에게 만들어준 서산의 이야기 등이 그런 예이다.

강필신의 사례에서 보이듯이, 서산은 독서의 필수품이었으면서도 소모품의 운명을 타고 났다. 그렇게 닳아 못쓰게 될 것이기에 깨달음을 새기는 기물명의 소재로 적합하지 않았던 듯하다.

그렇지만 영조 때의 남유용이나 조귀명처럼 서산이 지닌 귀한 의미를 알고 명(銘)을 남긴 이들도 있다. 남유용은 하도(河圖·주역의 바탕이 되는 그림·중국 복희씨 때 황허 강에서 용마(龍馬)가 지고 나왔다는 55개의 점으로 되어 있음) 모양으로 서산의 귀를 만들어 우주의 이치를 알고자 했다. 조귀명은 서산 귀의 배치를 관찰해 태극과 음양의 이치가 거기에 있다고 적었다. 잠자리의 투명한 눈에 천하가 담긴 것처럼, 자그만 서산에서 우주를 읽어내고자 하는 소망을 담았던 것이다.

수업 시간에 좋아하는 시를 적어오게 했더니, 한 여학생이 신석정의 시 ‘꽃씨와 도둑’을 적어 왔다. 곡절이 있지 않을까 싶어 물었다. 책갈피에 아빠가 적어둔 것을 우연히 발견하고 자기도 좋아하게 되었더란다. 고생하시는 아버지에게도 시를 좋아하던 시절이 있었던 같아서 더욱 좋다고도 했던 것 같다. 서산을 만들어 책 속에 꽂아 두면, 훗날 책 읽기를 좋아하는 딸이 그것에서 아빠와의 추억을 떠올려 주진 않을까.

김동준 이화여대 국어국문학과 조교수 djk2146@ewha.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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