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2/이 사람이 사는법]‘3전 4기’… 너덜너덜한 ‘아이디어 노트’가 생명줄

  • 동아일보
  • 입력 2011년 9월 24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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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패→성공→실패→재기… 남진농기 유남진 사장

유남진 사장은 지금도 본인이 직접 아이디어를 내고 제품을 개발한다. 유 사장 뒤로 보이는 것이 바로 그가 제품을 설계하고 개발하는 작업대다. 남진농기가 생산하는 벼 재배 화분엔 낱알이 달려 있었다. 평택=신원건 기자 laputa@donga.com
유남진 사장은 지금도 본인이 직접 아이디어를 내고 제품을 개발한다. 유 사장 뒤로 보이는 것이 바로 그가 제품을 설계하고 개발하는 작업대다. 남진농기가 생산하는 벼 재배 화분엔 낱알이 달려 있었다. 평택=신원건 기자 laputa@donga.com
그때 딱 한 번뿐이었다. 천산갑(갑옷 같은 비늘로 뒤덮인 포유동물)처럼 약점을 드러내지 않던 노신사가 감정을 드러내 보인 것은. 그의 눈가가 어느새 빨개져 있었다.

“디즈니랜드에서 우리 회사에 인형을 여섯 가지나 주문했어요. 거래차 미국에 가서 보니 토요일이라 사람이 그렇게 많을 수 없더라고. 두 시간 줄을 서 호텔 체크인을 하는데 35달러를 선불로 달라고 해요. 왜 그러느냐고 하니까 ‘정책상 한국 사람한테는 돈을 미리 받는다’고 그래요. 당시 정부에서 수출 기업인에게 바꿔준 3000달러를 보여줬어요. 그러자 ‘돈이 있으니 지금 내면 되겠네’ 이러는 겁니다.”

돌아서서 3, 4km를 걸었다. 봉제인형 사업을 시작한 지 3년 만인 1976년이었다. 걷는 동안 서러워서 울었다. 눈이 다 부어 도착한 다른 호텔. 직원이 말도 꺼내기 전에 100달러 지폐부터 내밀었다. “또 나가라고 할까 봐 그랬지요. 그때 이를 악물고 생각했어요. 나도 선진국 너희들만큼 할 수 있다고요.”

○ 사기 여파로 쓰러진 수출 1000만 달러 회사

농기구 개발업체인 남진농기를 운영하는 유남진 사장(74). 그는 여러 차례의 실패를 겪고도 오뚝이처럼 일어선 불굴의 인물이다.

누구에게 ‘왕년’이 없었겠느냐만 그에겐 너무나 화려한 옛날이 있었다. 36세인 1973년, 직원 7명으로 시작한 봉제공장은 2년 만에 300명 규모로 커졌고 1984년에는 1000만 달러 수출탑을 받았다.

1980년대 그는 봉제완구업계의 ‘메이저’였다. 앞발에 집게가 들어있어 막대에 매달릴 수 있는 곰과 너구리 인형을 세계 최초로 개발했다. 그의 땅을 지나치지 않고는 공장이 있는 서울 성동구 성수동에서 경기 성남시까지 가기가 어려울 정도였다.

위기와 기회는 언제나 함께 있는 법. 내리막길은 기막힌 신제품 개발과 함께 찾아왔다. 1980년대 초, 유 사장은 3년 연구 끝에 스위치를 넣으면 허리를 흔들며 춤추는 전자식 훌라인형을 개발했다. 당시로서는 놀라운 제품이었다. 인형을 보는 사람마다 감탄사를 연발했다.

그때 하와이에서 사업을 한다는 재미교포가 ‘독점판매권을 달라’며 찾아왔다. 현지 은행직원을 대동하고서였다. 1차로 30만 달러어치를 실어 보냈지만 한 달이 지나도록 전혀 연락이 없었다. 미국에 가 보니 이미 물건을 팔아 70만 달러를 챙겨 사라진 뒤였다.

1984년 6월, 유 사장은 일본 국제완구쇼에서 문제의 그 교포와 마주쳤다. 전시관 옥상으로 끌고 갔다. 그 교포는 “남진산업은 재벌에 가깝지 않소. 하와이에서 거지처럼 살던 불쌍한 교포를 도와준 셈 치고 포기하시오”라며 뻔뻔한 말만 되풀이했다.

기가 찼지만 제3국 땅에선 법에 호소하기가 어려웠다. “네가 일생 동안 단 1달러도 못 갖게 하겠다”며 윽박지르고 보내줄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어느 날 미국인 변호사 2명이 하와이 법원에 300만 달러 손해배상을 냈다. 사기를 친 재미교포가 자신의 이름으로 훌라인형 특허를 냈기 때문이었다. 지루한 법적 공방은 6년 동안 이어졌다. 1991년까지 끌고 간 재판은 결국 최초의 납품 비용인 30만 달러만 받는 선에서 끝났다.

문제는 재판을 하는 동안 사업이 안 되기 시작했다는 것이었다. ‘망했다’는 루머가 돌았고 현재 가치로 2000억 원에 달하던 재산이 거의 다 밑 빠진 독 같은 사업에 들어가고 말았다.

○ 세 번의 실패를 딛고서


인터뷰 도중 거듭해서 물었다. “사장님, 실패하셨을 때 기분이 어떠셨나요?” 유 사장의 대답은 언제나 예상을 빗나갔다. “낙담하지 않았어요. 저는 다시 일어설 자신이 있었어요.”

사실 봉제공장 건은 그의 첫 번째 실패가 아니다. 처음 시작한 전화기 제조는 정부의 규제로 문을 닫았고 두 번째인 조개양식은 어민들의 ‘약탈’로 끝이 났다. “배 10여 척이 나서서 33만 m²(약 10만 평)에 달하는 양식장에 있는 조개를 다 파갔어요. 어민들이 나를 몽둥이로 두들겨 패고 배에 가뒀는데 머리를 열 바늘이나 꿰맸었지요.”

지금 운영하는 회사의 연간 매출액은 15억 원 정도. 하지만 그는 화려한 옛날에 연연하지도, 예전의 실패에 미련을 갖지도 않는다고 했다. 오직 앞만 보며 달려갈 뿐이다. 그렇다면 이 노인의 ‘무모한 자신감’은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유 사장이 너덜너덜해진 공책을 꺼냈다. 그의 ‘아이디어 노트’였다. “올해 3월 5일까지 105가지를 연구했어요. 그중 30건을 활용했으니 아직도 70여 건이 남았네요. 자기 실력이 없으면 도전을 못하지만 나는 아직도 자신이 있어요. 그러니 이렇게 다시 일어난 것이지요.” 그는 “아이디어를 실현하려면 앞으로 50년 이상 더 살아야 한다”고 덧붙였다.

티끌 모아 태산이었다. 호기심과 작은 아이디어가 모여 유 사장에게 ‘평생의 힘’이 되고 있었다. 현재의 사업 아이템은 1980년대 지방 공장을 다니면서 한 메모에서 탄생했다. ‘왜 힘들게 모내기를 해야 할까’란 호기심에서 흙톨볍씨(볍씨를 황토에 넣고 구슬 모양으로 뭉쳐 직파가 가능하게 한 것)가 탄생했고 논에서 모를 재배하는 불편함을 없애기 위해 ‘아파트식 육묘기’를 만들어 노동력을 80%나 절감했다. 이 육묘기 샘플은 정부에 의해 북한에도 지원됐는데 북한 당국이 “제품을 더 보내달라”고 요청했다고 한다.

흙으로 된 논두렁 수로에 박아 넣어 손쉽게 논물을 관리하는 플라스틱 ‘개량 물꼬’는 미국과 일본에 수출할 예정이다. 곧 흙속에서 자연분해되는 친환경 모판도 시판할 계획이다.

“돈에도 눈이 있고 발이 있어요. 자기와 함께 있어야 할 만한 사람을 찾아서 움직입니다. 그러나 돈엔 입이 없어서 언제 가고 온다는 말은 못해요. 돈만 찾는 사람은 돈을 못 벌어요. 돈은 제대로 된 목적이 없는 곳엔 모이지 않아요.”

칠순의 노사장은 아직도 제품을 개발하느라 눈코 뜰 새가 없다. 시간이 아까워 낮잠도 자지 않고 자다가도 메모를 한다. 그의 인생 수레바퀴는 앞으로도 계속 알차게 돌아갈 것이다.

유 사장에게 사기를 친 재미교포는? 빈털터리가 되어 택시운전을 하는 모습이 마지막으로 목격됐다고 한다. ‘돈에도 눈이 있다’는 유 사장의 말이 들어맞은 듯하다.

평택=문권모 기자 mikemoo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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