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고학에게 말 걸기 20선]<2>고고학의 모든 것

  • 입력 2009년 6월 10일 02시 51분


◇고고학의 모든 것/폴 반 엮음/루비박스

《“19세기, 모험가들과 골동품 애호가들은 알려지지 않은 과거의 보물이나 지식들이 바로 그들의 발밑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당시의 고고학은 대부분 독학으로 터득했을 수많은 아마추어의 것이었다.…그들의 방식과 수단이 무엇이었든지 간에 그들은 모두 오늘날 학문으로서 고고학의 과학적인 토대가 만들어지는 데 일조했다.”》

대륙별 유적지의 ‘타임캡슐’

고고학의 범위는 정글 속에 감춰진 오지부터 도심 한가운데 공사 현장까지 인간의 손이 닿은 장소 어디든지 뻗어나간다. 고고학의 연구 대상도 왕의 무덤부터 작은 도자기 조각까지 인간이 만들고 행한 것을 모두 아우른다. ‘고고학의 모든 것’은 근현대 고고학자들의 업적과 그동안 발견된 전 세계의 유적지를 대륙별로 나눠 사진과 함께 담고 있다.

“고고학자의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순간이었다. 인부들을 모두 보내고 오로지 홀로 남았다. 여러 해에 걸친 고된 여정 끝에 드디어 찾아온 기회. 바야흐로 그 누구도 손대지 않은 무덤을 발견하는 순간이었다.”

하워드 카터(1874∼1939)는 1920년대 이집트 왕가의 계곡에서 투탕카멘의 무덤을 발굴한 고고학자다. 그는 이집트 유적 발굴에 조수로 참여하기 시작한 17세 무렵부터 평생을 이집트 유적 발굴에 바쳤다. 카터는 제18왕조의 왕 투탕카멘이 이집트 왕가의 계곡에 묻혔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나일 강 서안에 위치한 왕가의 계곡에서는 1707년부터 고대 이집트 신왕국 시대 왕들의 무덤이 속속 발견되고 있었다. 이곳은 1989년 람세스 2세 아들들의 무덤이 발견돼 최근까지 100개가 넘는 방을 발굴했는데도 작업이 끝나지 않을 정도다.

카터는 1922년 11월 1일 람세스 6세의 무덤을 발견했다. 3일 뒤에는 막혀 있던 문 뒤쪽의 계단 16개와 마주한다. 그는 11월 5일 일기에 “이곳이 왕족의 무덤이 맞을까? 아니면 왕족의 보물창고일 뿐일까? 몇 인치 정도만 더 파 내려간다면 나는 투탕카멘의 표지가 새겨진 인장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고 한시름 놓을 수 있을 텐데”라고 썼다. 3주 뒤 다시 작업이 시작됐고 마침내 투탕카멘의 이름이 새겨진 인장이 드러났다. 부장품으로 가득한 부속실은 비우는 데만 7주가 걸렸다. 카터는 이 무덤을 기록하고 보존하는 데 10년을 들였고 미처 작업을 완료하기 전인 1939년 3월 사망한다.

1991년 스위스 티롤 알프스에서 하이킹을 하던 독일인 커플이 빙하 인근의 얼음에서 황갈색 시체를 발견한다. ‘아이스맨’으로 불리는 이 시체는 선사시대로부터 가장 오래, 완벽하게 보존된 인간이다. 시신과 함께 순수한 구리로 만든 도끼, 화살이 그대로 들어 있는 화살통, 짚을 채워 넣은 보온용 신발, 나무로 틀을 잡은 가죽 배낭, 부싯돌과 의학 목적으로 사용했다고 추측되는 원형통이 함께 발견됐다.

아이스맨은 선사시대에서 온 타임캡슐이었다. 그가 사용한 연장 표면을 현미경으로 살피자 야생 염소와 사슴 등의 털과 피, 조직이 발견됐다. 창자 안 내용물에 대해 유전자(DNA) 분석을 한 결과 그가 마지막으로 먹은 음식이 붉은사슴 고기와 시리얼이라는 사실이 드러났다. 2001년 실시한 컴퓨터단층촬영(CT)에서는 시신의 어깨에서 돌화살촉이 발견돼 사망 원인에 대한 논쟁을 낳았다. 아이스맨에 대해서는 드러나지 않은 사실이 더 많다. 발견 이후 20년이 가깝도록 각종 연구가 진행됐지만 아직까지 사인이나 그가 산에서 무엇을 왜 했는지에 대해서 밝혀진 바가 없다. 이처럼 과거의 흔적을 찾아 수많은 고고학자가 각지의 유적을 발굴했지만 여전히 세계 구석구석에는 현대인의 손이 닿지 않은 ‘새로운 발견’들이 기다리고 있다.

이새샘 기자 iamsa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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