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삶 나의 길]<113>‘愛人敬天’ 도전 4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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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09년 10월 19일 03시 00분


<36>최고의 경영 실적은 아이들

장영신 회장이 1970년 서울 중구 신당동 자택에서 자녀들과 함께 찍은 사진. 왼쪽부터 채은정 애경㈜ 전무, 장 회장, 채동석 애경그룹 유통 및 부동산개발부문 부회장, 채형석 애경그룹 총괄부회장. 사진 제공 애경그룹
장영신 회장이 1970년 서울 중구 신당동 자택에서 자녀들과 함께 찍은 사진. 왼쪽부터 채은정 애경㈜ 전무, 장 회장, 채동석 애경그룹 유통 및 부동산개발부문 부회장, 채형석 애경그룹 총괄부회장. 사진 제공 애경그룹
새벽 출근-한밤 퇴근하는 생활에
아이들 얼굴 제대로 보기 힘들어
스스로 잘 커준 아이들 고마울 뿐

대기업을 경영하면서 남편 없이 혼자서 3남 1녀를 키웠다고 했더니 자녀 교육 비법이 뭐냐고 묻는 사람이 있었다. 질문한 사람은 뭔가 특별한 철학과 방법을 가지고 자녀들을 키웠으리라 기대했겠지만 사실 특별히 내세울 만한 것은 없다.

한국처럼 교육열이 높은 나라는 세계에서도 찾기 힘들다. 교육사업이 수조 원대의 시장을 형성하고 있고, 매년 대학수학능력시험을 치르는 날이면 전국적으로 직장인들의 출근시간을 늦출 정도로 온 나라가 교육에 열정을 쏟아붓는다.

나도 회사를 맡고 나서 가장 걱정했던 일이 아이들의 교육이었다. 내가 처음 경영일선에 나서기 시작했을 때 아이들의 나이가 12세(현 채형석 애경그룹 총괄부회장), 9세(현 채은정 애경㈜ 전무), 8세(현 채동석 애경그룹 유통 및 부동산개발부문 부회장), 2세(현 채승석 애경개발 사장)였다. 위의 세 아이들이야 어느 정도 커서 말도 통하고 자기들끼리 곧잘 놀았고, 밥도 종종 어른의 도움을 받지 않고 스스로 챙겨먹으니 조금은 안심이 되었지만 두 살배기 막내에게는 엄마의 존재가 절대적인지라 늘 가슴이 아팠다.

갑작스럽게 먼저 세상을 떠난 남편 대신 1972년 7월 회사로 출근하기 시작하면서 요즘의 맞벌이 부부가 그렇듯이 나 역시 친정어머니가 집에서 살림을 하면서 아이들을 맡아주셨다. 다른 맞벌이 부부는 퇴근하고 나면 아이와 함께 시간을 보낼 수 있고 짧은 시간이나마 매일 아이를 볼 수 있었지만 나는 그렇게 하기 어려웠다. 살림만 하던 주부가 규모 있는 기업의 경영을 맡게 된 것도 어려운데 당시 회사 안에서 내가 경영을 맡은 데 대해 곱지 않은 시선도 있었다. 이런 현실에서 회사 일을 빨리 파악하기 위해 저녁 늦게 귀가하고 새벽에 출근하는 생활이 불가피했다. 3, 4일 연속 아이들의 잠든 모습만 보는 일이 다반사였다.

이 때문에 ‘오늘 친구네 집에 놀러 갔다느니, 누구랑 다퉜다느니, 받아쓰기에서 한 문제 틀려서 안타까웠다느니’ 하는 소소하면서 추억이 될 만한 얘기를 아이들과 나눌 시간이 별로 없었다. 지금도 나는 다른 엄마처럼 따뜻하게 신경 쓰지 못한 점을 아이들에게 무척이나 미안하게 생각한다.

그래도 아이들은 잘 자라주었다. 엄마가 고군분투하는 모습을 먼발치에서 바라보며 자신들 스스로 마음을 잡고 착하게 자라주었다. 내가 경영인으로 변신한 지 30년이 훌쩍 넘었을 때 어느 언론 인터뷰에서 “가장 보람된 일이 무엇이냐”는 질문을 받은 적이 있다. 보통의 기업 회장이었다면 그룹의 성장사 가운데 하나를 소개했을 테다. 하지만 나는 곰곰이 생각하다가 조금은 엉뚱한 답변을 해서 리포터를 당황케 했던 기억이 있다. “30여 년을 경영인으로 살면서 가장 보람되고 기쁜 일은 우리 아이들이 잘 자라준 것입니다.”

새벽별을 보고 출근했다가 아이들이 잠든 한밤중에 퇴근을 하다 보니 아이들을 볼 시간이 적었고, 대화를 나누는 것은 물론 아이들에게 용돈도 제때 주기도 어려웠다. 궁여지책이었지만 경제공부도 시킬 겸 한 달에 한 번씩 월급처럼 용돈을 줬다. 용돈을 주고 나서 아이들을 살펴보면 딸은 계획을 가지고 돈을 쓰는지 늘 용돈에 여유가 있는 듯해 보였는데, 세 아들은 어디에 쓰는지 늘 용돈이 부족해 딸에게 빌려 쓰곤 했다.

그리고 용돈을 받으면 갚고, 월말엔 다시 빌리는 일을 한동안 반복했다. 요즘으로 치면 ‘돌려 막기’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에 대해 직접 물어보거나 확인할 필요는 없다는 생각에서 그냥 지켜보기만 했다. 그때나 지금이나 나는 자식들에게 일일이 따지면서 간섭하고 잔소리하는 스타일은 못 된다. 회사에 어떤 중요한 결정이 있으면 자식들 스스로 내리게 하고 나는 지켜보기만 한다. 자식들이 물어오면 내 의견을 말하는 정도에서 그친다.

엄마의 개입 없이도 시간이 지나니 용돈을 관리하는 법을 깨달았는지 세 아들도 용돈을 받는 날짜에 맞춰 잘 나눠 쓰는 모습이 보였다. 그때를 즈음해 준비물을 빼놓고 등교하는 일이 없어졌고, 운동화나 옷 등 필요한 물건도 저희들끼리 시장에 가서 사와 쓰곤 했다. 지금 생각해도 어린 나이에 기특했다.

<장영신 애경그룹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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