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을 다시 한번]상소길…유배길… 길을 통해 본 조선

  • 입력 2009년 6월 6일 02시 56분


◇ 역사, 길을 품다/최기숙 외 지음

2년 전쯤 출판 일을 시작했을 때 가장 많이 갔던 곳이 국회도서관이다. 그곳에서 논문을 읽다 보면 기획할 만한 주제들이 떠오르곤 했다.

이 책은 2007년 우연찮게 본 논문 한 편에서 얻은 아이디어로 만든 책이다. 조선시대 선비들이 과거를 보러 오가는 과정에서 보고 듣고 겪은 것에 대해 쓴 기록을 분석한 논문이었다. 논문을 보는 순간 길을 통해 조선시대를 바라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정치도 사회도 생활도 아니고 길을 통해 본다. 생각할수록 매력적이었다.

길을 삶의 은유로 그토록 빈번히 사용하면서도 우리는 왜 한 번도 조선시대를 길이라는 테마를 통해 살펴보지 못했던 걸까. 곧바로 조선을 이해하기 위한 10가지 길을 뽑아냈다. ‘첩보길’ ‘상소길’ ‘요양길’ ‘휴가길’ ‘유배길’ ‘장례길’ 등을 골랐고, 10명의 연구자들에게 글을 청탁했다.

이 책은 여러 명이 쓴 책이지만 필자들의 글이 맛깔스럽고 톤도 비슷해서 꼭 한 명이 쓴 책처럼 느껴졌다. 언론의 서평도 대체로 좋았다. 그런데 2007년 9월 출간된 이 책은 적어도 1만 부는 팔릴 거라는 출판사의 기대에 한참 못 미쳤다. 4000부쯤에서 속도가 현저히 꺾이더니 4500부가량 나가는 데 그쳤다.

이유가 뭘까 생각하다가 결국 제목이 문제였다고 결론 내렸다. 이 책의 기획 취지는 조선시대 사람들이 길에서 맞닥뜨린 삶의 구체적인 풍경을 엿보자는 것이었다. 국경 너머를 염탐하는 임무를 받고 길을 떠난 관원들이 돌베개를 베고 잠들면서 밤하늘을 쳐다봤을 때의 기분, 과도한 업무에 지칠 대로 지친 하급 관리가 어렵게 휴가를 얻어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에 맞닥뜨린 상념과 서울 생활에 대한 회고, 관찰사가 온다는 소식을 듣고 동구 앞까지 마중을 나가는 지방관의 무거운 심정을 독자들에게 살아 있는 그대로 전해주자는 것이었다.

하지만 제목은 이런 기획 취지를 표현하기엔 너무 추상적이었다. ‘역사, 길을 품다’라니. 전형적인 장고 끝의 악수였다. 너무 많은 걸 포괄하려다가 아무것도 껴안지 못한 셈이었다. 실제 몇몇 독자에게 그런 지청구를 듣다보니 자책도 꽤 심하게 했다. 언젠가 개정판이나 후속편을 내게 되면 “조선의 여행자들”이라는 제목을 걸고 다시 한번 독자들을 찾아가고 싶다.

이은혜 글항아리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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