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스트셀러 따라잡기]10대 딸이 읽어주길 바라면서…

  • 입력 2008년 1월 12일 02시 56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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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 생활 몇 년째. 초보 티는 벗었지만 여전히 조심스러운 게 있다. 기사를 만드는 작업. 누군가에게 읽힐 글을 쓰는 떨림은 익숙해지질 않는다.

더구나 읽을 대상이 구체적일 땐 훨씬 쑥스럽다. 영국에 있는 친구들, 한 유학생 부부가 그렇다. 부실한 칼럼을 쓸 때마다 인터넷에서 챙겨 읽는다. 고마웠다가 난처했다가. 언젠가부터 글을 쓰면 그들을 떠올린다. 옥스퍼드대 캠퍼스의 한 귀퉁이 풍경을 그려 본다.

책도 마찬가지다. 작가만큼 만드는 이도 누군가를 염두에 둔다. 보통은 불특정 다수일 터. 그러나 강동권 이학사 대표는 달랐다. 지난해 말 ‘지식인을 위한 변명’을 출간하며 딱 한 명을 마음에 품었다. 다름 아닌 강 대표의 큰딸이다.

‘지식인을 위한 변명’의 저자는 장 폴 사르트르. 프랑스 실존주의 철학가이자 작가. 20세기 최고 지성 중 하나로 꼽힌다. 그가 1965년 9, 10월 일본 도쿄와 교토에서 세 차례 강연한 내용을 엮은 게 이 책이다.

강연이라지만 내용은 어렵다. 원서가 출간된 지 40년이 넘은 데다 원래 어투도 딱딱하다. 건강한 사회를 만드는 지식인의 사회적 역할을 논한다. ‘보편화를 위한 비판적 기능의 수행과 이를 담보하기 위한 올바른 판단력과 분별력….’ 뭐 이런 문구를 들여다보면 눈이 빠지려고 한다.

“고등학생이 읽기에 결코 쉬운 책이 아니죠. 근데 문득 이런 생각이 듭디다. 10년 넘게 출판사를 꾸렸는데 내 아이들은 과연 몇 권이나 읽었을까. 아니 이해는 했을까. 그래서 내 딸도 편안히 읽을 책을 한번 만들고 싶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2007년판 ‘지식인을 위한 변명’이 탄생했다. 해적판으로 벌써 여러 권이 나왔으나 프랑스 갈리마르 출판사와 계약도 다시 했다. 현장감을 위해 강연 어투도 살렸다. 그리고 뭣보다 ‘주석(註釋)’이 빼곡하다.

사르트르가 ‘드레퓌스 사건’을 언급하면 그 해설만 한 페이지 반바닥. ‘특수성’은 두 페이지가 넘는다. 모두 딸의 눈높이를 위해서였다. 어려운 대목은 하나하나 짚어 가며 차근차근 설명하고 싶은 마음. 거짓말 좀 보태 책의 3분의 1이 넘을 것 같은 주석엔 아버지의 사랑이 담겼다.

근데 이 책, 이학사 쪽에서 보면 ‘대박’이다. 석 달 좀 넘었는데 초판 3000부가 다 나갔다. 물론 철학책이 이 정도 팔린 것도 대단한 일. 그런데 철학 역사 분야에서 좋은 책 내기로 평판 높은 이학사. 100여 종을 내며 2만 부 넘은 책이 한 권도 없던 강 대표에겐 의미가 크다.

더욱 뜻 깊은 건 서점가에서 강 대표에게 들려준 소식.

“특히 방학을 맞아 학생이 많이 본답니다. 교사들도 ‘고등학생이 읽기에 참 좋다’고 하더군요. 아직 딸이 읽지 못했는데…. 뭐라고 얘기할지 벌써 두근두근합니다. 허허.”

이 글을 쓰는 도중에 영국에서 메신저로 말을 건다.

“이번 주는 내용이 뭐야?”

“음, 마감하느라 바쁘니 나중에 연락하자.”

강 대표처럼 꼬깃꼬깃 주석 달 능력은 없고…. 서울 하늘을 온통 덮어 버린 눈. 서걱서걱 묻혀 눈사람이 돼 가는 마음을 대신 띄운다.

정양환 기자 ra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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