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길, 배낭 속 친구가 되어주는 책 30선]<16>주당천리

  • 입력 2008년 7월 15일 02시 51분


◇허시명의 주당천리/글, 사진 허시명·예담

《술병(잔)을 보고 취한 적이 있는가? 내게는 그런 경험이 있다. 2005년 서울국제주류박람회장에서였다. 재미있는 술잔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잔을 받치는 높은 굽 안에 방울이 들어 있어서, 잔을 흔들면 탈랑탈랑 소리가 났다. 가야 고분에 잠들어 있던 토기에서 영감을 얻어 만든 방울잔이었다. 쥐어보니 방아쇠처럼 손가락 마디에 착 감겼다.…술맛도 보기 전에 술잔과 술병에 취하기는 처음이었다.》

‘8년 숙성’ 맛깔스러운 전통술 이야기

여행작가 양영훈 씨는 애주가가 아니다. 그는 “주량이 소주 2, 3잔에 불과해 술자리를 즐기지는 않지만 전통문화에 대한 관심의 연장선상에서 저자의 전통 술 이야기가 무척 흥미롭게 읽힌다”고 이 책을 추천한 이유를 밝혔다.

2007년 국세청 주최 제1회 대한민국주류품평회 심사위원으로 활동하는 등 신뢰도 높은 전통 술 품평가인 저자의 세 번째 술 기행 책. 8년 동안 발품을 팔아 전국 곳곳을 찾아다니며 건져 낸 좋은 술의 향기가 물씬 묻어난다.

주당(酒黨)이라 자처하는 사람이라면 한 줄 한 줄 읽어내려 가면서 꼴딱꼴딱 침을 삼킬 만한 얘기다. 달걀과 참기름이 들어가는 제주도의 보양주인 ‘오합주’, 조선시대 정승 황희의 후손 집안에서 빚고 있는 ‘호산춘’, 일본에 술을 전해 준 백제 사람을 기려 후쿠오카 사람이 빚은 ‘수수고리’…. 잘 빚은 술맛처럼 구수한 필담이 가득하다.

이 땅의 조상들이 술에 대해 읊은 멋진 시와 산문도 삽입됐다.

“대추 볼 붉은 골에 밤은 어이 떨어지며/벼를 벤 그루터기에 게는 어찌 내려오나/술 익자 체 장수 돌아가니 아니 먹고 어이할까.” 저자는 황희의 시조를 인용하며 좋은 술을 만난 듯 흥에 겨워한다.

천 리를 돌고 얻었다며 내세운 ‘주당천리 10계명’도 재미있다. 취향이나 술버릇에 따라 공감하기 어려운 항목도 있겠지만, 평소 술 때문에 고민이 많은 사람이라면 술을 멋있게 즐기는 방법에 대한 음주 고수의 조언을 눈여겨 읽어볼 만하다.

“주는 대로 마시지 말고 골라 마시자”, “술에 떡이 되지 말고, 술이 덕(德)이 되게 하라”처럼 주도(酒道)에 대한 지적이 있는가 하면 “감미료 술을 마시지 말라” 등 건강을 위해 좋은 술을 가려 마시라는 얘기도 잊지 않았다.

저자는 독특한 술 기행 경험담을 전통 술에 대한 풍부한 지식과 적절히 버무려 놓았다. 양 씨는 “배움의 즐거움과 읽는 재미가 각별하다”며 “원고를 쓰다가 꽉 막힌 느낌이 들 때 이 책을 찬찬히 읽다 보면 나도 모르게 실마리가 슬슬 풀린다”고 했다.

점점 사라져 가는 전통 술에 대한 애석한 심정도 배어 있다. 전통 술 전문가인 저자에게 좋은 우리 술이 하나 둘씩 사라지는 것은 우리 땅을 조금씩 잃어가는 것과 다름없이 아프고 안타깝다.

“좋은 술을 지키려면 좋은 물이 있어야 하고, 물을 지키려면 땅이 오염되지 않아야 한다. 술의 잔치는 물의 잔치이고 땅의 잔치다. 술의 축제는 그 속에 녹아든 이 땅의 쌀과 농산물의 축제여야 한다.”

책 마지막 장에는 저자가 찾아간 술도가의 위치를 보여 주는 지도, 주소, 연락처를 실었다. 저자처럼 “술이라면 입술도 거치지 않고 바로 삼키는, 달건 묽건 진하건 모두 상관없이 다 좋다” 하는 애주가라면 보람 있는 여름휴가 행선지를 골라 볼 자료로 좋은 참고가 되겠다.

손택균 기자 soh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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