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과 자연의 경계를 넘어 30선]<18>진리와 방법

  • 입력 2008년 3월 26일 02시 50분


《“해석학적 현상에서는 진리의 경험을 인정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 진리의 경험은 철학적으로 정당화되어야 할 뿐만 아니라, 그 자체가 일종의 철학적 사유 방식이기도 하다.”》

‘진리와 방법’은 철학자 가다머(1900∼2002)의 주저(主著)일 뿐 아니라 해석학의 대표작으로 꼽힌다. 가다머가 1948년부터 1960년까지 12년에 걸쳐 집필한 이 역작은 해석학을 독일 철학계의 중심적인 논제로 대두시킨 계기가 되었다. 워낙 오래된 저서인 만큼 비판과 지적도 따랐지만 아직껏 이 책을 능가하는 해석학 저서는 나온 것이 없다는 게 철학계의 평가다.

이 책을 읽기 위해선 해석학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19세기 중반 자연주의적 과학주의적 정신의 득세로, 철학의 고유한 연구 대상이었던 인간 정신은 자연과학의 부속물로 여겨지기 시작했다. 해석학은 철학의 문제 영역인 정신과학이 자연과학의 일종이 아니라 독자적인 정체성을 갖고 있음을 증명하는 것이다.

가다머가 진리와 방법이라는 제목을 생각해낸 것은 아니었다. 그는 ‘철학적 해석학의 기본 특징들’을 염두에 두었지만 출판사 발행인이 ‘해석학’이라는 용어를 낯설게 여겨서 제목을 바꾼 것. 그러나 진리와 방법이라는 제목은 적절했다. 진리에 이르는 ‘방법’이란 자연과학의 객관적 방법론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다. 가다머의 의도는 과학주의·객관주의의 방법론으로는 접근할 수 없는 경험 세계를 찾아, 여기에서도 진리가 획득될 수 있음을 보여주려는 것이었다.

‘경험’이 중요하다. 경험이란 자연과학에는 없고 정신과학에만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 경험은 주체와 객체가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변화를 끌어내는 것을 가리킨다. 가다머는 정신과학의 진리의 ‘경험’을 찾아내 고유한 정당성을 규명하는 데 초점을 맞췄다.

가다머는 ‘진리와 방법’에서 상이한 세 영역의 연구를 이행했지만 이 영역들은 철학적으로 통일성을 갖고 있었다. 세 영역이란 예술과 역사, 언어의 철학적 분석을 말한다. 2000년 국내에 번역된 ‘진리와 방법Ⅰ’은 예술 경험의 진리 문제를 탐색한다.

이론을 세우는 게 아니라 경험을 분석한다는 점에서 예술에 대한 논의는 정신과학에 속한다. 해석학에 따르면 예술은 개인의 사사로운 영감에서 발동한 것이 아니라 인간 정신의 보편적인 진리를 표현하는 것이다. 예술 ‘경험’, 즉 예술작품에서 다른 방식으로는 도달할 수 없는 진리를 경험한다는 것은 자연과학적 방법론에 맞서는 예술의 철학적 의미를 형성한다. 가다머는 이렇게 예술 경험에 대한 이해 지평뿐 아니라 예술작품의 존재론과 그 해석학적 의미를 물음으로써 예술 경험의 자기정체성을, 나아가 정신과학의 독자성을 규명한다. 가다머는 고대 그리스철학부터 딜타이, 칸트, 후설, 하이데거 등 철학사를 훑으면서 예술의 고유한 인식 방법과 진리에 대해 비판적으로 고찰한다.

난해하기로 소문난 텍스트다. 고려대 이길우(철학) 교수, 강원대 이선관(철학) 교수, 동국대 임호일(독문학) 교수, 강원대 한동원(철학) 교수가 이 책의 번역에 함께했다. 역사와 철학에 대해 논의한 ‘진리와 방법Ⅱ’도 번역 중이며 이르면 연내 출간될 예정이다.

김지영 기자 kimj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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