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마음속의 별]만화가 이두호가 반한 목판화가 이철수

  • 입력 2007년 8월 11일 03시 02분


코멘트
작업실의 이두호 화백. 뒷배경의 그림은 자신의 대표적 만화인 임꺽정.
작업실의 이두호 화백. 뒷배경의 그림은 자신의 대표적 만화인 임꺽정.
제천 농군 흙손이 파낸 소나무… 단군시절 첫하늘이 열리고

연재만화를 그리느라 일주일에 두세 번은 밤샘을 해야 했던 십여 년 전 어느 날, 마감을 끝내고 비몽사몽으로 TV를 켰다가 벌떡 일어나 앉았다. 화면에 몇 점의 판화가 나오는데 졸고 있는 내게 마치 찬물을 좍 끼얹는 느낌이었다.

그러니까 나는 목판화가 이철수 선생을 만나기 전에 그의 작품과 먼저 만났던 것이다. 두 번째로 선생의 작품과 만난 것은 인사동에 붓을 사러 갔을 때다. 한 화랑으로 들어갔는데 사람들이 붐볐다. 스님도, 수녀님도 있었다.

“종교화를 전시하나?” 의아해하면서도 휙 둘러볼 요량으로 다니다가 또 한번 찬물세례를 받은 듯한 느낌이 들었다. TV에서 봤던 그 느낌의 판화들이었다. 화려한 채색도 없고, 정교하지도 않고, 선과 점의 소박한 그림과 짧은 글로 표현했을 뿐인데 이처럼 전율을 느끼게 하고 감탄과 미소를 짓게 하다니…. 잔손질 없는 간단하고도 적절한, 그 선의 맛과 느낌은 해탈의 경지 같았다.

‘단청’이란 제목의 그림이 생각난다. 능청스럽게 가지를 뻗은 소나무에다 천연스레, 고궁이나 절에서 볼 수 있는 단청을 입혀 놓은 게 아닌가! 나는 소나무를 좋아한다. 대개의 나무는 가지를 위로, 옆으로 뻗기 마련인데 소나무는 위나 옆으로만 아니라 흥에 겨우면 아래로 뻗기도 하고, 옆으로 뻗다가도 아니다 싶으면 슬그머니 뒤로 가기도 한다.

소나무의 그런 고집과 자유가 좋다. 그런 소나무에다 단청을 입혀놨으니, 만화가인 나도 상상하지 못한 것을 이처럼 그려놓은 이 판화가는 누구란 말인가?

그런 충격이 있은 뒤 가깝게 지내는 후배 만화가한테서 전화가 왔다.

“이철수 알지요?” “글쎄, 누군데? 영희 남편?” “제천으로 내려가 사는 화간데요.” “만화가가 아니고?”

농담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평소에도 하고 싶은 말은 다 하는 후배였다.

“어린이날 행사에 사인회도 하고 머리도 식힐 겸 만화가들 몇 분 모시고 오라는데 함께 가시지요?”

후배는 가까운 곳에 볼만한 소나무도 있다고 덧붙였다. 소나무라는 말에 따라갔다. 과연 행사장 가까운 호수 제방에는 아름드리 소나무들이 풍채를 뽐내고 있었다.

우리를 초청한 화가는 다부지고 눈빛이 맑았다. 화가는 행사가 끝나자 우리를 그의 집으로 안내했다. 마당이 넓고 아늑했다. 내심 ‘화가랍시고 좋은 곳에 자리 잡았군. 농사야 겉치레일 테고’라며 작업실로 따라들어 갔더니 웬걸, 실내엔 이젤도 없고 캔버스도, 물감도 보이지 않았다. 대신 손때로 윤이 반질반질 나는 판화용 조각칼과 도구들이 정리돼 있고, 한쪽에는 크고 작은 나무판들이 벽을 기대고 켜켜이 쌓여 있는 게 아닌가.

그런데 여기저기 걸린 판화를 보고 깜짝 놀랐다. 군더더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선, 때로는 실 같고, 때로는 에움길 같고, 밭고랑 같고, 지렁이처럼 기는가 하면, 용처럼 꿈틀대기도 하고, 소리 없이 소리치는 그림, 근엄하지도 않으면서 옷깃을 여미게 하는 그림. 바가지도, 물도 없으면서 정신이 번쩍 들도록 찬물을 끼얹은 그 그림들!

“세상에. 그때 그 전시장의 판화들도 이 선생님 작품이었네!”

내 감탄이 신음처럼 들렸던지 일행이 나를 쳐다보았다. 겸연쩍음을 숨기려고 되레 후배에게 투덜댔다.

“야, 화가가 뭐야 화가가. 판화가라고 해야지, 목판화가 이철수!”

그날 이후 이철수 선생의 전시회에는 한 번도 빠지지 않았다. 제천 집으로도 세 번 더 찾아갔다. 후배를 꼬드겨 갔을 때는 선생의 집에서 자고 왔다.

선생 내외는 금실이 좋다. 세 번째 갔을 때는 함께 갔던 아내가 돌아오는 길에 부러운 듯 내게 한 말이다.

“농사도 그렇게 열심히 짓는 부부가 서로 깍듯이 존칭어로 대화를 나누는 것을 보면 꼭, 한 쌍의 잉꼬 같다. 학 같기도 하고!”

“우리도 그래 볼까?” “좋지요!”

“그러려면 우리도 티격태격 많이 싸웠어야 했는데, 지금부터라도 싸워볼까.”

어깨에 몸을 기대던 아내가 의아한 듯 나를 빤히 올려다본다. 후배의 귀띔으로는, 선생 내외는 운동권에서 젊음을 꽃피울 때 서로 고집을 꺾지 않고 주장도 굽히지 않아 너나들이로 많이 싸웠단다. 부부가 되어서도 많이 싸웠는데 궁리 끝에 서로 존칭어를 쓰기 시작한 뒤로는 목청을 돋우어 싸운 적이 없게 되었단다.

언젠가 그게 사실인지 아닌지 직접 물어 봐야겠다고 생각했는데 재작년 5월 초에 만화가 몇 명과 선생의 집으로 갔다. 나도 아내와 함께 갔다. 그러나 집 안엔 아무도 없었다. 간다는 연락을 했었다는데….

그때, 저 멀리 밭에서 두 분이 소리치며 손을 흔들었다. 연방 구덩이를 파고 무언가를 심으면서. 아뿔싸! 토요일이지만 두 분에게는 지금이 눈코 뜰 새 없는 농번기가 아닌가! 우리는 죄지은 것 같아 우르르 달려가 괭이 들고 호미 쥐고 부산을 떨었다.

땅거미가 지고 어둠이 깔리자 마당가에 있는, 드럼통을 잘라 만든 화덕에서는 삼겹살이 구워지고 소주잔이 돌았다. 염치도 없이 얼마나 웃고 떠들었는지 하늘엔 별이 총총했다. 그 별들이 쏟아질 것 같아 나는 그만 선생한테 묻고 싶은 말도 잊어버리고 말았다.

“이철수 선생님, 두 분의, 그 존칭어, 후배의 귀띔이 사실인가요?”

다음에 가면 꼭 물어봐야지, 다른 것도 물어볼 게 많지만.

이두호 만화가

■“임꺽정 보면서 많이 배웠죠”

갼틂뼁姑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