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와의 첫 만남은 1984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나는 조계종 총무원 교무국장이었는데, 우연히 만해 스님의 일대기를 다룬 ‘님의 침묵’이라는 연극이 서울 세실극장에서 막을 올린다는 것을 알게 됐다. 첫날부터 한달음에 달려가서 봤다.
어린 시절(출가 전)에는 사물놀이와 농악에 심취했고, 영화도 좋아해 여러 극장을 전전하며 하루에 4편씩 영화를 보기도 한 나였지만, 연극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은 ‘님의 침묵’이 계기가 됐다.
10대에 출가한 나는 1960년대 말에 서울로 올라왔는데 서울에서 가장 먼저 찾아가서 본 것이 탑골공원의 만해 스님 비였다. 그 비에 새겨져 있던 만해 스님의 시 ‘춘주(春晝)’를 40년이 넘은 지금까지도 그대로 암송할 수 있을 만큼 갓 출가한 내게 만해 스님은 큰 흠모의 대상이었다. 그러니 ‘님의 침묵’이라는 제목만으로도 나는 한달음에 달려갔다.
나이가 스물일고여덟쯤 됐을까? 젊지만 사려 깊은 눈매를 한 배우가 주인공인 만해 스님 역을 맡았는데 내 눈에는 배우가 연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아예 만해 스님이 살아서 무대에 서 계신 것 같았다.
그날 이후 나는 ‘님의 침묵’이 끝날 때까지 3개월 내내 하루도 빼놓지 않고 매일 극장에 가서 공연을 봤다. 월요일에 공연을 쉬는 요즘과 달리 그때는 일주일 내내 하루도 쉬지 않고 공연이 있었고, 더블 캐스팅도 없이 한 배우가 혼자 공연을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김갑수 씨 역시 3개월 공연 내내 쉬지 않고 무대에 섰는데 놀랍게도 내가 매일 가서 봤는데도 그는 매번 똑같은 큰 감명을 내게 주었다.
그의 연기를 보면서 나는 연극 속에서 종교가 해야 할 일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을 보게 됐다. 종교는 삶의 윤활유, 비타민의 역할을 해야 한다는 것이 나의 종교관인데, 연극도 그렇다. 순수 예술은 내가 지향하는 종교의 길과 크게 다르지 않음을, 종교와 예술은 둘이 아니라 형제 관계와 같다는 것을 나는 그 작품을 통해, 그 혼신의 힘을 다하는 연기를 통해 깨닫게 됐다.
종교는 믿음이고 믿음은 결국 순수함이다. 연기도 마찬가지다. 순수함이 없다면 그는 매번, 똑같은 공연을 할 때마다 관객들에게 감명을 줄 수는 없었을 것이다. 나는 종종 법당에서 설법하는 것을 배우의 모노드라마에 빗대기도 한다. 그런데 설법을 하다 보면 어떤 때는 나 스스로도 감격스러울 만큼 내 ‘모노드라마’가 잘되기도 하지만, 어떤 때는 마음에 들지 않는 날도 있다. 그러기에 나는 매번 큰 감명을 느끼게 해 준 김갑수라는 배우의 열정과 성실함, 무대에 대한 지극한 경건함과 순수함에 놀라게 된다.
‘님의 침묵’ 이후 자주 그의 공연을 보러 갔고, 개인적으로도 그와 가까워졌다. 실제로 만난 그는 내성적이긴 하지만 재미있는 말도 잘하는 사람이다. 하지만 그가 하는 말을 가만히 듣고 있으면 번뇌와 아픔이 많은 젊은 시절을 보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님의 침묵’ 말고 그의 작품 중에서 최고로 꼽을 수 있는 것은 ‘애니깽’ 같다. 멕시코 강제 이주 노동자들의 이야기를 다룬 ‘애니깽’은 모르긴 해도 아마 그가 가장 힘들게 연기한 작품일 거라고 생각한다. 그는 완전히 슬픈 역사 속의 상황에 빠져들어 공연이 끝난 후에도 거기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힘들어하는 것이 눈에 보였다.
내가 보기에 그는 쉽게 작품에 덤비지 않지만 한번 맡은 연기는 철저히 그 속으로 빠져 들어간다. 그는 자신이 맡은 배역에 주관적으로 들어가서 이를 객관적인 연기로 표현해 냄으로써, 관객들로 하여금 객관적인 사물(상황)을 주관적으로 받아들이고 감명을 받도록 만드는 훌륭한 배우다.
요즘은 그를 주로 화면을 통해서 만나게 된다. 하지만 들리는 말이, 그렇게 영화와 방송 활동으로 모음(돈)이 생기면 대학로에서 공연을 올리고 소극장을 운영하고 있다니 눈물겹다. 편히 살 수 있는데도 여전히 쉽지 않은 연극을 계속하려는 그의 모습이 숭고해 보이기까지 한다.
예술인과 연예인의 관계는 기쁨과 즐거움과 같다. 기쁨은 씨앗이요, 즐거움은 열매다. 어떤 일을 하든 혼을 드리우는 일을 하는 사람은 예술인이다. 나는 그가 한평생 예술인으로 살다가 예술인으로 죽을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혼신의 힘을 다해 연기에 한 생을 쏟는 그의 자세는 종교인과 다를 바 없다고 생각한다.
그의 얼굴을 본 것도 1년쯤 된 것 같고, 바쁘다 보니 전화도 뜸하다. 하지만 동상이몽이라는 말처럼 가까이 있어도 생각이 다르면 가까이 있는 게 아니다. 마찬가지로 멀리 떨어져 있어도 서로 살아가는 방식이 같다면 같이 있는 거다. 그런 의미에서 배우 김갑수는 나와 가까이 함께하는 친구이자 도반이다.
정리=강수진 기자 sjkang@donga.com
■ “세상에 가르침 아닌 것 있으랴”
‘내 마음속의 별’ 취재를 위해 정우 스님(사진)의 휴대전화로 전화했다. 흘러나오는 스님의 컬러링이 신선했다. 뮤지컬 ‘맘마미아’에 나오는 ‘댄싱 퀸’.
정우 스님이 주지로 있는 구룡사와 ‘맘마미아’를 제작한 신시뮤지컬컴퍼니는 19년째 ‘동거 중’이다. ‘님의 침묵’을 연출해 정우 스님과 처음 인연을 맺었던 고(故) 김상열 씨가 극단 신시(현 신시뮤지컬컴퍼니)를 창단하자 극단의 어려운 살림을 잘 아는 스님이 선뜻 절 한쪽을 극단 측에 보금자리로 내어 주면서 절과 극단의 ‘이색 동거’는 시작됐다.
종교뿐만 아니라 스님은 세상 모든 일에 마음을 열고 받아들인다. 요즘도 공연장을 자주 찾는 스님이 본 공연으로는 동성애, 마약 등이 등장하는 소극장 뮤지컬 ‘렌트’부터 작고한 개그맨 김형곤 씨의 대학로 ‘성인 코미디’까지 다채롭다.
“(성인 코미디는) 당시 김형곤 씨와의 개인적인 인연 때문에 보게 됐다. 내가 가서 보기엔 좀 난한 부분도 있었지만 그래도 갔다. 모든 건 취사선택의 문제다. 지혜롭고 슬기롭게 받아들일 수 있다면 이 세상에 이치가 아니고 가르침이 아닌 것이 없다.”
정우 스님에게서 ‘별’로 꼽힌 김갑수 씨는 “불자는 아니지만 젊은 시절 어렵고 힘든 일이 생길 때마다 스님을 찾아뵙고 큰 위안을 얻곤 했다”며 “어렵게 연극을 하던 시절 스님은 나를 비롯해 배고픈 연극인들에게 밥이라도 사 먹으라며 슬쩍 손에 돈을 쥐여 주고 가시곤 했다”고 고마워했다.
김갑수 씨는 ‘님의 침묵’에 대해서는 “3개월 공연을 끝내고 나니 65kg이었던 몸무게가 55kg까지 빠질 만큼 혼신의 힘을 다했던 작품”이라며 “젊은 시절 그 작품을 통해 알게 된 만해 스님의 꼿꼿한 정신과 의지는 내게 평생 연극 정신을 잊지 않고 연기자로서 살아가는 데 큰 영향을 줬다”고 말했다.
강수진 기자 sjka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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