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인&토크]와인을 발가벗겨 즐겨보세요

  • 입력 2006년 10월 13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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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가 앞에 서 있다. 10대 소녀인지, 30대 여인인지 알 수 없다. 얼굴에 가면을 썼기 때문이다. 두터운 외투까지 입어 말랐는지, 풍만한지도 알 길이 없다.

궁금하다. 얼굴은 예쁜지, 몸매는 날씬한지, 나이는 몇 살이나 됐는지.

어떻게 하면 될까. 가면과 외투를 벗기면 된다.

와인도 마찬가지다. 와인이 갖고 있는 본연의 맛과 향을 제대로 확인하고 싶으면 와인의 가면과 외투를 벗기는 ‘작업’을 해야 한다. 와인을 병에서 디캔터로 옮겨 담는 ‘디캔팅(decanting)’이다.

디캔터에 담은 와인은 공기와 닿는 표면적이 병보다 넓어진다. 더 많은 산소와 접촉하면서 성숙해진다.

디캔팅의 원래 목적은 오래 묵은 와인의 찌꺼기를 걸러내고 순수 와인을 얻기 위해서다. 묵은 와인은 익는 동안 포도껍질에 든 탄닌 성분이 병 바닥으로 가라앉는다. 묵은 와인의 찌꺼기는 입자가 매우 작고 까맣다. 입자들은 와인의 향과 맛을 가린다.

그래서 오래 묵은 와인은 대체로 디캔팅 후 바로 마시는 게 좋다. 시간이 지나면 향이 달아나 와인에서 얻는 것은 그저 삼키는 맛뿐이다.

디캔팅의 방법은 크게 세 가지다.

우선 병에서 디캔터로 옮겨 바로 마시는 것으로 가장 일반적이다.

둘째는 ‘더블 디캔팅’으로 병에서 디캔터로 옮긴 뒤 다시 병으로 옮기는 경우다. 디캔터에서 다시 병에 담기 전에 반드시 병을 씻어 병 속의 찌꺼기를 제거해야 한다.

‘올 댓 와인’의 저자 조정용 씨는 “무통 로쉴드(1982)처럼 힘이 강한 와인을 마실 때는 더블 디캔팅이 좋다”고 설명했다. 더블 디캔팅을 한 다음 12∼24시간 기다려야 무통 로쉴드 특유의 맛과 향을 즐길 수 있을 정도란다. 아니면 2010년까지 참고 기다리든지.

마지막으로 디캔터에서 디캔터로 옮기는 작업을 여러 번 반복하는 ‘멀티 디캔팅’이 있다. 탄닌이 아주 많은 와인을 빠른 시간 내에 마시고 싶을 때 효과적인 방법이다. 뜨거운 물을 컵에서 컵으로 반복해서 옮기면 빨리 식는 것과 같은 논리다. 반복하는 횟수는 시음자 마음.

디캔팅 마니아들은 와인을 마실 때마다 디캔팅을 해야 직성이 풀린다. 모든 와인을 발가벗겨야 와인을 제대로 마신다고 생각한다. 탄닌이 많은 카베르네 쇼비뇽이나 네비올로 같은 품종으로 만든 영 빈티지 와인에는 맞는 말이다. 하지만 피노 누아처럼 섬세한 와인은 자칫 고유의 맛을 잃을 수도 있다. 발가벗은 여인이 항상 아름다운 것은 아닌가 보다.

▽잠깐!=디캔팅할 때 사용되는 용기를 디캔터(decanter)라 부른다. 목이 가늘고 바닥이 둥글고 넓어 마치 꽃병이나 실험실의 플라스크처럼 보인다. 디캔터 종류는 크게 용량별, 포도품종별로 나뉜다. 피노 누아처럼 섬세한 와인은 목이 학처럼 긴 디캔터를 쓴다. 카베르네 쇼비뇽처럼 탄닌이 많은 와인은 목이 넓고 바닥이 넓은 디캔터를 사용한다.

이호갑 기자 gd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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