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하, 이맛!]땀이 뻘뻘… 배가 후끈… 눈이 번쩍… ‘해장국’

  • 입력 2009년 10월 16일 02시 5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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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나면 우리/왜 술만 마시며/저를 썩히는가./저질러 버리는가.//좋은 계절에도/변함없는 사랑에도/안으로 문 닫는/가슴이 되고 말았는가.//왜 우리는 만날 때마다/서로들 외로움만 쥐어뜯는가./감싸주어도 좋을 상처,/더 피 흘리게 하는가.//쌓인 노여움들/요란한 소리들/거듭 뭉치어/밖으로 밖으로 넘치지도 못한 채…’ <이성부의 ‘만날 때마다’>

우리 기쁜 젊은 날. 좌충우돌, 모두 발정 난 수캐처럼 몰려 다녔다. 끝없이 퍼마셔댔다. 대책 없는 외로움. 밑도 끝도 없는 ‘허허 쓸쓸’. 술은 자유요, 꿈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휘발성. 깨고 나면 다시 술을 마셔야 꿈을 꿀 수 있었다.

석 달 동안 하루 5∼6병씩, 소주 500병을 쳐 죽였다는 시인 박정만(1946∼1988). 그는 도대체 왜 술을 그렇게 마셔댔을까. ‘한 세상 살다보니 병도 홑적삼 같다’며 ‘해지는 쪽으로 가고 싶다’고 했을까.

‘이 목숨이 차라리/냇가의 개밥풀꽃으로 하얗게 피어나/한 철만 살다가 핑그르르 꽃바람에/모가지를 툭 꺾고 사라졌으면/뉘우침은 이제 한 잎도 안 남았어.’ <박정만의 ‘차라리’에서>

술은 물의 아들. 신 새벽은 타는 목마름으로 온다. 냉수를 벌컥벌컥 마신다. 목울대를 타고 성엣장이 시린 줄을 그으며 배 속까지 떠내려간다. 진저리를 친다. 진땀이 난다. 쓰린 속. 신물이 넘어온다. 머리속이 납덩이처럼 무겁다. 눈은 츠레슴게 아니 게슴츠레하다. 지난밤 주막에서 늙은 노새처럼 투레질했던 업보를 받아야 한다. 왜 그리 앙앙불락했던가.

해장은 ‘장을 풀어준다(解腸)’는 뜻이 아니다. 해장은 원래 ‘해정(解정)’에서 나온 말이다. ‘정(정)’은 ‘술 때문에 걸린 병’을 뜻한다. 즉, 해장은 ‘술병을 풀어준다’는 뜻이다. 해장국은 술병을 풀어주는 국인 셈이다.

‘술 때문에 걸린 병의 증상, 곧 ‘정(정)’을 영어로는 ‘행 오버(Hangover)’라고 말한다. 그 행오버를 없애는 해장술을 그들은 ‘아이 오프너(Eye Opener)’라고 부른다. 눈을 뜨게 해주는 술, 개안주(開眼酒)가 곧 해장술의 뜻이다. 해장술을 ‘헤어 오브 더 도그(Hair of the dog)’ 즉 ‘개털’이라고도 한다. 개에 물렸을 때 서양 사람들도 그 개의 털을 약간 깎아 물린 상처에 바르면 곧 치료된다는 민간처방을 갖고 있다. 숙취란 다름 아닌 술이 물어뜯은 위장이 아파서 생기는 것이니 그것을 치료해 주는 해장술도 개털이나 같다는 것이다.’ <심연섭의 ‘건배’에서>

햐아! 해장술이라니! 사오십대 한국 남자들을 키운 건 팔 할이 소주와 삼겹살이었다. 그들은 1970, 80년대의 황음무도한 시대를 소주에 절어, 불판에 삼겹살을 구우며 보냈다. 긴급조치로 열혈청년들을 마구 잡아갈 즈음, 이 골목 저 골목 삼겹살 굽는 냄새가 솔솔 나기 시작하더니, 1980년대에는 온 나라가 삼겹살 굽는 냄새로 코를 찔렀다. 북한산 골짜기에서부터 지리산 피아골까지 삼겹살 굽는 냄새가 진동하지 않는 곳이 없었다. 그때 속 풀이는 얼큰한 라면국물이나 짬뽕국물이면 그만이었다.

술은 열덩어리이다. 술을 마시면 뜨거운 열덩어리가 머리로 올라간다. 그래서 머리가 지끈지끈 아프고 몽롱하다. 배 속도 열에 지쳐 쓰리고 아프다. 그러다가 견디기 힘들면 입 밖으로 게워낸다.

결국 숙취해소는 몸 안의 열을 빨리 없애는 게 지름길이다. 땀이나 소변으로 자연스럽게 배출하는 게 으뜸이다. 억지로 사우나에서 땀을 빼면 기운만 바닥난다. 몸속 깊은 곳에 똬리를 틀고 있는 열은 그대로 있다. 1시간 안팎 천천히 등에 땀이 젖을 정도로 걷는 게 최선이다. 물론 따끈한 꿀물이나 해장국도 도움이 된다. 술 깨겠다고 찬물로 세수하는 건 땀 배출에 방해만 된다.

해장국은 우선 뜨거워야 한다. 펄펄 끓는 국물을 훌훌 마시다보면 땀이 줄줄 흐르고, 콧물까지 훌쩍거리게 된다. 속이 시원하다. 재료는 신토불이(身土不二). 그 땅에서 흔한 것 중 숙취와 간에 좋은 것을 쓰면 된다. 뜻밖에 동해안 뱃사람들은 시원한 물회로 속을 다스린다. 속초 오징어물회도 그중 하나다.

전주콩나물국, 서울청진동 선지해장국, 서울 무교동북엇국, 부산 해운대복국, 대구 소핏국, 인천 뼈다귀감자탕, 양평 뼈다귀해장국, 충청도 올갱잇국, 하동 재첩국, 대관령 황태뭇국, 동해안 물메기탕, 아귀탕, 서해안 낙지연포탕, 조개탕, 바지락국, 우럭젓국, 통영 도다리쑥국, 시락국, 경주 메밀묵김치해장국, 제주 돼지고기칼국수, 김칫국, 대구탕, 계란탕, 우거지해장국, 내장탕, 육개장, 감자탕, 갈비탕, 소고기뭇국, 아욱국, 시금칫국, 사골우거지국, 우거지갈비탕, 팟국, 김치찌개….

이 땅에 내로라하는 해장국은 많다. 모두 단백질이 풍부하고 간에 좋다. 술꾼들은 저마다 자신의 몸에 맞는 해장국으로 쓰린 속을 달랜다.

서울 무교동북어국집(02-777-3891)은 장안술꾼들의 속을 40년 넘게 달래주고 있는 곳이다. 메뉴는 오직 하나 북엇국뿐. 밤새 고아낸 사골국물에 북어 계란 두부를 넣어 끓인다. 밑반찬은 오이지 부추겉절이 김치 3가지에 새콤하고 칼칼한 물김치뿐. 그 맛의 조화가 단순하면서도 절묘하다. 그 옆엔 역시 40년 전통의 배춧국 전문집 내강(02-777-9419)이 숨어있다. 서울 청진동해장국 청진옥(02-735-1690)도 빼놓을 수 없다. 1937년 개업.

전주콩나물국 현대옥(063-228-0020) 왱이집(063-287-6980), 삼백집(063-284-2227)과 부산해운대 초원복국(051-743-5291), 통영 서호시장 원조시락국(055-646-5973)도 두 번째 가라면 서러워 할 속풀이집이다.

‘술은 입으로 오고/사랑은 눈으로 오나니/그것이 우리가 늙어죽기 전에/진리로 알 전부이다./나는 입에다 잔을 들고/그대 바라보고 한숨짓노라.’ <예이츠 ‘A Drinking Song’에서>

박정만 시인은 화장실 변기 위에 앉은 채 꽃잎처럼 ‘몸을 툭 꺾고’ 해 지는 나라로 갔다. ‘저 광활한 우주 속으로’ 사라졌다. 왜 사내들은 만날 때마다 술만 퍼마시는가. 왜 시린 속에 해장술을 또 부어대는가.

김화성 전문기자 mar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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