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낌이 있는 편지]전파의 바다에 ‘나만의 신호’ 보내고 싶어

  • 입력 2004년 11월 5일 17시 24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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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 저는 요즘 새로운 소설을 쓰고 있습니다.

종일 책상 앞에 앉아 있다 보면 선생님이 말씀하신 대로 작가는 ‘모국어의 땅’에서 견뎌내야 하는 존재라는 것이 절실하게 와 닿습니다. 작가란 혼자서 밑그림을 그리고 뼈대를 만들고 살을 붙여가는, 고독한 ‘수공업자’의 운명을 타고난 사람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고요.

선생님께서 작가는 이 땅을 잠시 떠나있을 수는 있지만, 생의 터전 자체를 옮길 수는 없다고 하셨지요. 그런데 조금 다른 맥락에서 보면 우리가 사는 시대는 점점 더 공간의 문제는 중요시되지 않는 것 같습니다. 물론 이것은 정보통신 산업의 비약적인 발전 때문이겠지요.

이를테면 저는 외국에 유학 중인 친구와 e메일이나 메신저 등의 매체를 통하여, 친구가 국내에 있을 때보다 더 자주 서로의 근황을 주고받아요. 새로운 전자통신 매체의 발달이 우리를 예전과 다른 차원의 삶으로 이끌어 가고 있는 것은 분명합니다.

며칠 전 밤늦은 시간에 모르는 번호로부터 문자메시지를 한통 받았습니다. ‘혹시 이 번호를 사용하는 분이 계신가요?’ 무슨 일인가 싶었지만, ‘예, 제가 사용 중입니다’라는 답장을 보냈지요. 다음날 이른 아침, 그 번호로부터 다시 문자메시지가 들어왔어요.

‘결례가 되었다면 죄송합니다. 다만 요새 저에게 좀 힘든 일이 있어서, 그걸 익명의 분께 털어놓고 대화하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그만 잠들어 버렸네요. ㅠ.ㅠ 좋은 하루 보내세요! *^^*’ 기호로 감정을 표현하는 그림말(이모티콘)이 가득한 그 짧은 편지(?)를 읽고 저는, 잠시 먹먹해졌습니다. 그는, 낯선 사람에게 자신의 속내를 털어 놓으면서 무엇을 얻고 싶었을까요?

‘뉴미디어의 철학’에서 마크 포스터는, 새로운 커뮤니케이션의 상황에 따라 소통의 과정과 언어의 본질이 변화되고 더 나아가 인간 주체 위상이 변모된다고 했지요. 휴대전화는 언제부터인가, 우리의 일상적 삶에서 가장 중요한 소품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실수로 전화기를 집에 놓고 나왔을 때 겪는 막막함과 답답함 그리고 불안감은 현대인들이 이미 그 속에 얼마나 길들여져 있는가를 말해 주지요.

이런 상황에서 예전보다 소통의 양적 측면이 증가한 것은 확실해 보입니다. 친구나 연인, 가족간에 하루에도 몇 차례씩 통화하고 문자메시지를 보내면서 자신의 자잘한 일상을 서로에게 ‘보고’하는 경우를 심심찮게 볼 수 있으니까요. 심지어 ‘휴대전화 위치추적 시스템’을 통해 지금 상대방이 있는 위치조차 확인할 수 있는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왜, 이런 신천지에 살면서 더욱더 외롭고 고독하다고 외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을까요? 소통의 기회와 양이 그토록 많아졌지만 그 질과 깊이의 문제에서도 그럴까요? 이런 과잉된 커뮤니케이션 방식은 역설적으로 개인과 개인 사이의 새로운 ‘전자족쇄’를 의미하는 것은 아닌지 의심스럽기도 합니다. 휴대전화를 통해서야 비로소 자신의 존재감을 확인하고 확인 받는 시대란, 얼마나 잔혹한지요. 그렇다고 해서 새로운 문명을 부정하고 옛날이 좋았다는 식으로 모든 문제를 바라 볼 수는 없겠지요?

어쨌든 지금의 상황을 인정하면서 그 안에서 소통의 문제를 생각해야 하겠습니다. 깊어 가는 계절은, 피할 수 없이 외로운 ‘단독자’로서의 개인의 위치를 뼈아프게 각인시켜줍니다. 사람들 사이의 따뜻한 신호가 더욱 간절해지는 계절, 이제 좀 더 내밀하고 절제된 ‘나만의 신호’를 송신하고 싶습니다.

정이현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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