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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중권의‘놀이와 예술’]<3>체스, 그 숨막히는 두뇌싸움

입력 2004-06-28 18:31업데이트 2009-10-09 19: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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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셀 뒤샹의 조각작품 ‘살아있는 주형’(1967년). 체스를 ‘영혼의 풍경’이라며 체스 두기를 즐겼던 뒤샹은 체스를 소재로 한 작품도 많이 남겼다.-사진제공 진중권
튀니지의 한 시장에서 근사한 대리석 체스를 발견했다. “130디나르!” 어쭈, 너희에게 메디나가 있다면 우리에겐 남대문이 있다. “30디나르!” 흥정은 깨졌다. 며칠 후에 벌어진 2회전에서 팽팽한 줄다리기 끝에 결국 60디나르에 물건을 손에 넣었다. 아랍권에서는 체스를 두는 것만이 아니라 체스를 사는 것도 머리싸움. 그들이 손가락으로 하늘을 가리키며 “알라에게 맹세코!”라고 하면 대충 깎을 만큼 깎은 것이다.

○ 체스와 로그의 탄생

체스는 인도에서 발생했다. 탄생 설화 자체가 체스의 이성적 본질을 말해준다. 인도의 발힛 왕이 체스를 발명한 현자(賢者)에게 상을 내리려고 그에게 무엇을 원하느냐고 물었다. 현자는 겸손하게 그냥 체스 판을 이루는 64개의 칸에 보리알이나 좀 채워 달라고 했다. 첫째 칸에는 한 톨, 둘째 칸에는 두 톨, 셋째 칸에는 네 톨, 넷째 칸에는 여덟 톨….

왕은 현자의 이 소박함에 놀라면서 요구를 흔쾌히 들어주기로 했다. 하지만 이는 큰 오산이었다. 1×2×4×…64×64, 이렇게 곱해 나가면 마지막 칸에 놓을 알곡의 수는 2의 63승, 무려 922경 3372조368억5477만5808톨. 인도 전역에서 생산되는 알곡을 다 합해도 모자랄 분량이었다. 학창시절에 배웠던 ‘로그’는 이렇게 체스와 함께 탄생했다.

○ 국운을 건 게임

그 후 체스는 페르시아로 전해진다. 전설에 따르면 어느 날 인도의 사신이 페르시아 궁정에 ‘체스’를 들고 와 다짜고짜 이 게임의 규칙을 알아맞히라고 했단다. 못 맞히면 페르시아가 인도만 못하다는 얘기이므로, 마땅히 자기들에게 조공을 바쳐야 한다는 것. 다행히 페르시아의 재상이 가까스로 수수께끼를 풀고, 이로써 인도와 대등한 관계가 되었다고 한다.

얼마 후 페르시아는 아랍인들에게 점령당한다. 그들은 페르시아의 영토를 정복했지만 페르시아의 놀이에는 정복당하고 만다. 체스는 칼리프의 궁정에 받아들여진다. 이어서 이슬람의 이베리아 반도 침공을 계기로 체스는 유럽에까지 전해지고, 거기서 ‘왕의 놀이’라 불리게 된다. 군주가 갖춰야 할 덕목인 군사적 전략과 정치적 통치술의 모델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 혼자 두는 체스

인도의 체스는 원래 네 사람이 주사위를 던져서 하는 게임이었다고 한다. 이를 주사위 없이 두 사람이 하는 형태로 바꾼 것은 페르시아인이었다. 16세기에 잠깐 4인용 체스가 다시 등장하기도 했다. 때는 바야흐로 종교전쟁의 시대, 한 군주가 동시에 여러 나라에 맞서 싸워야 했던 혼란한 시절이 아니었던가. 네 명이 두는 체스도 있다면, 혹시 혼자 두는 체스는 없었을까?

오스트리아의 작가 슈테판 츠바이크의 소설 ‘체스’에는 그 얘기가 나온다. 나치에 의해 호텔 방에 감금된 변호사 ‘B박사’. 고립감에 미쳐 버리지 않으려고 그는 혼자 상상의 체스를 둔다. 이를 위해 제 인격을 늘 둘로 쪼개야 했던 그는 결국 분열증에 걸려 발작을 일으킨다. 덕분에 감금은 풀리고, 브라질로 망명을 가는 여객선 위에서 그는 우연히 마주친 체스 세계챔피언과 세기의 대결을 벌인다.

처음 두는 실제의 체스 판에서 박사는 승리를 거둔다. 마치 체스 기계처럼 움직이는 챔피언의 수를 미리 읽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미리 몇 수 앞을 내다보는 박사에게 상대의 뻔한 수를 기다리는 것은 참으로 견디기 힘든 고문이었다. 이를 간파한 챔피언은 설욕전에서 일부러 시간을 끈다. 초조해진 박사는 상상의 체스 속에서 저 혼자 앞서가고, 결국 착란에 빠져 실제의 체스 판에선 어처구니없는 악수를 두고 만다.

○ 체스 판 위의 앨리스

16세기 유럽의 궁정에서는 살아 있는 인간을 말로 사용하는 실물 체스가 유행했다. 마당에 그려진 거대한 체스 판 위에 갑옷 입은 보병과 말을 탄 기병들을 세워 놓고, 높은 단상에 앉아 이를 굽어보며 입으로 명령을 내려 말을 움직이는 것이다. 우리 눈에는 고약한 취미로 보이나, 어쨌든 체스의 말들이 실물이 되어 현실세계로 나온 모습은 장관이었을 게다.

현실세계에서 체스 안으로 들어갈 수는 없을까? 왜 없겠는가. 루이스 캐럴의 동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서 앨리스는 거울을 통해 체스의 세계로 들어간다. 거기서 하얀색 폰(pawn·장기 말로 졸에 해당)이 된 앨리스는 열한 칸 움직인 끝에 마침내 여왕이 되어 게임에서 이긴다. 체스규칙을 활용한 스토리 설정이다. 체스에서 폰은 앞으로 전진하다가 마지막 칸에 이르러 막강한 힘을 가진 퀸(queen)으로 변하기 때문이다.

○ 체스는 예술이다

체스는 문학만이 아니라 조형적 상상력의 원천이 되기도 한다. 초현실주의자 막스 에른스트의 작품 ‘퀸을 가지고 체스를 두는 킹’ (1944년)에서 ‘킹(king)’은 판 위에서 몸이 점점 커져 마침내 판 밖 게이머의 역할을 넘겨받는다. 체스가 체스를 둔다. 그것이야말로 두 사람도 아니고, 한 사람도 아니고, 그야말로 ‘노바디(nobody)’가 두는 체스다.

체스는 그 자체가 조형예술이다.

흑과 백 64칸으로 이루어진 체스 판은 현대예술의 ‘구성(composition)’을 닮았다. 실제로 독일의 화가 파울 클레는 체스 판을 그대로 작품으로 옮기기도 했다. 게다가 직선과 대각선으로 판 위를 지나는 말들의 움직임. 그것을 옮겨 그리는 것만으로도 훌륭한 추상회화가 된다. 가운데 그림을 보라. 13세의 체스 천재와 어느 프로 기사 사이에 실제로 벌어졌던 유명한 대국의 기보(棋譜)라고 한다.

○ 구상에서 추상으로

체스의 말들은 조그만 조각 작품이다. 고전적인 체스에서는 말들이 실물을 그대로 빼닮아 그것들을 판에 배열해 놓으면 그대로 전장의 미니어처가 된다. 하지만 현대로 올수록 체스의 말은 점점 더 구(球), 원주, 원뿔과 같은 추상적인 형태에 가까워진다. 예술도 마찬가지다. 고전예술이 주로 구상(具象)이었다면, 현대예술의 주류는 추상(抽象)으로 바뀌었다.

현대예술은 실물을 닮지 않은 그 추상성 때문에 마치 작품 밖의 현실에 대해 아무 말도 못할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말이 실물을 닮지 않았다고 체스를 못 두는가? 실물을 닮지 않은 둥글넓적한 중국 장기의 말을 가지고도 우리는 얼마든지 초나라와 한나라 사이의 전쟁을 연출한다. 예술도 마찬가지다. 현실을 닮지 않은 현대의 추상예술도 얼마든지 현실에 관해 이야기할 수 있다.

진중권 평론가 중앙대 겸임 교수 권재현기자 confett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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