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성민의 야한여자-당찬여자]만인의 연인 심은하

  • 입력 2004년 6월 3일 17시 16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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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기에 나오는 유명한 설화 ‘도미전’은 도미와 아내의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다.

여색을 탐하던 백제의 개로왕은 작은 부락의 우두머리 도미의 아내 아랑을 보고 오로지 그녀를 가져야겠다는 마음뿐이다. 아름답고 품위 있는 아랑은 개로왕의 회유와 핍박에도 지아비를 향한 사랑을 저버리지 않는다.

개로왕은 결국 도미의 눈을 뽑아 장님을 만든 후 작은 배에 태워 강물에 흘려보낸다. 아랑도 그 뒤를 따라 도망쳐 남편이 있는 섬으로 간다. 도미는 그곳에서 피리를 불고 있었다. 두 사람은 갈대를 꺾어 초막을 짓고 풀뿌리를 캐어먹고 살았다.

어느 날 아랑은 강물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보았다. 황홀하게 아름다운 얼굴이었지만 그 때문에 기구한 운명이 되었다는 생각에 얼굴에 상처를 내고 추한 모습으로 변해버린다.

그들은 다시 왕의 추격을 피해 고구려로 들어가 구걸을 하며 떠돈다. 고구려 사람들은 아랑을 그저 맹인 남편을 둔 추한 얼굴의 걸인으로 생각했다. 도미의 애절한 피리 소리는 사람들의 심금을 울렸고 그에 맞춰 부르던 아랑의 노래는 천년의 세월을 두고 전해진다.

사랑을 위해 자신의 아름다운 모습을 포기한 아랑. 이 이야기를 영화로 만든다면 아랑의 역은 단연 심은하다. 그녀는 아랑과 닮은 데가 많다.

언제부터인가 TV에서도, 스크린에서도, 잡지나 신문에서도 심은하가 연기활동을 하고 있다는 이야기는 없다. 그저 언젠가 우리 곁에 돌아오리라는 근거 없는 추측만이 난무할 뿐이다. 전성기를 달리던 그의 돌연한 은퇴는 괜찮은 여배우 하나를 놓쳤다는 아쉬움을 남겼다.

심은하는 그림을 공부한다. 그녀의 그림을 보면서 그녀가 그림을 몸속으로 집어넣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 몰두, 그것이 심은하의 모습이다. 그림은 그녀가 마음으로 생각하고, 역사적으로 바라보며, 철학적으로 음미하는 법을 배우고 있는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8월의 크리스마스’의 청순함과 ‘텔 미 썸딩’의 광기를 모두 가지고 있는 심은하는 양귀비꽃 같다. 신비스럽다는 말보다는 은근히 꽃대를 치켜세우는 침착한 자긍심이 돋보인다. 이런 이중적인 섹스어필은 남성들에겐 중독적이다. 그리고 자주 비교의 대상이 된다.

내가 잘 아는 문학 평론가의 아내는 화가다. 그녀가 어느 날 남편에게 “나와 이영애를 비교해서 선택을 하라면 누구를 선택하겠느냐”라고 물었다. 문학평론가 하시는 말씀이 “이영애 정도라면 절대로 당신을 포기할 수 없다”고 했다.

다시 아내가 물었다. “그러면 당신의 마음이 흔들릴 정도의 여자가 누구냐.”

남편은 “심은하라면 생각해볼 수 있다”고 했고 그의 아내는 “그럼 나는 이영애와 심은하의 중간이네”라며 웃었다고 한다.

부담스러운 섹스어필이 난무하고 무조건 벗고 보는 게 성적 매력이라고 착각하는 요즘, 심은하에게 느꼈던 지적인 청순함과 드러내지 않는 매혹이 더욱 그리워진다. 그녀는 마음의 고요와 정적을 간직한 여인이다. 그런 점에서 축구 선수 홍명보와도 닮았다. 관중의 열광적인 함성 속에서도 흐트러지지 않는 고요함.

그렇게 심은하는 담백하다. 사랑도 자기 것이 아니면 담백하게 정리한다. 담백함은 인생에 빚을 지고 살지 않는다는 뜻이다. 담백함이 주는 당당함으로 자신만의 추구를 도모할 수 있고 용감하게 인생의 변화를 만들어갈 수 있다.

심은하가 그립다. 남에 대한 배려가 없는 지식으로 무장한 아마조네스 여전사나 풍요한 식탁이 가져다 준 풍만한 육체는 이젠 지겹다.

소동파가 가인박명(佳人薄命)이라 했던가. 사랑을 지키기 위해 얼굴을 망가뜨린 아랑처럼 심은하는 자신의 삶을 위해 배우의 화려함을 버린 것일까. 이제 더 이상 배우 심은하를 못 본다고 해도 다른 모습으로 당당하고 열심히 살아갈 모습이 그려진다.

보석디자이너 패션 칼럼니스트 button@keb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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