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쟁점 대담]<4>경제의 바퀴, 시장이냐 국가냐

  • 입력 2004년 5월 30일 17시 06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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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대 말 외환위기 이후 미국식 신자유주의적 세계화 흐름에 따라 경제 전반의 구조조정이 진행돼 왔다. 그러나 최근에는 노사정(勞使政) 간의 대타협을 핵심으로 하는 유럽식 소강국(小强國) 모델이 또 다른 대안으로 부상하고 있다.

양자가 극명하게 차이를 보이는 쟁점은 시장에 정부가 어느 정도, 어떤 방식으로 개입하는 것이 적절한가다. 정부의 합리적 개입을 어느 정도 인정해야 한다는 이근식 서울시립대 교수(경제학·57)와 정부 역할은 시장 바깥에서 공정경쟁을 위한 토대를 만드는데 그쳐야 한다고 역설하는 나성린 한양대 교수(경제학·51)가 시장과 국가의 건설적 관계에 대해 토론을 벌였다.

▽이근식 교수=애덤 스미스와 존 케인스는 시장에 대한 정부 개입에 대해 서로 반대되는 주장을 했습니다. 두 사람이 생각하는 ‘정부’가 달랐기 때문이죠. 스미스는 상인들에게 농락당하는 수준의 정부를 생각했기 때문에 정부 개입을 최소화하자고 했지만, 케인스는 공평무사하고 유능한 정부가 도박판 같은 시장 위에 얹혀 있는 경제를 조절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정부 개입 이전에 정부 자체를 투명하고 합리적으로 만들어야 하며 시장과 사회를 통제하기 위해 제정됐던 과거의 악법을 고치는 일이 선행돼야 할 것입니다.

▽나성린 교수=시장은 기본적으로 완전하지 않기 때문에 정부가 개입하지 않을 수 없다는 데는 이 교수 의견에 동의합니다. 하지만 정부 개입에는 한계를 두어야 해요. 시장규모가 작을 때는 정부가 전체 시장을 관리할 수 있지만 규모가 커지면 정부가 자원 배분을 효율적으로 할 수 없습니다. 한국의 시장 규모는 이미 정부가 좌우할 수 있는 단계를 넘어섰죠. 이런 상황에서는 시장에서 공정하게 완전경쟁이 이뤄질 수 있도록 정부가 제도로 뒷받침만 해 주는 정도의 개입이 적절합니다. 물론 사회적 형평성 보장 차원에서 소득과 부의 재분배를 위해 정부가 작동할 필요는 있겠지만요. 하지만 그런 역할도 지나치면 개인이 부를 창출하고 싶은 의욕을 약화시켜요.

▽이=하지만 인간다운 생활을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의식주나 교육 등은 사회가 제공해 줘야 합니다. 사회적 약자에 대한 기본적 생활보장은 수천 년 전부터 어느 사회에서나 체제와 이념에 관계없이 해 온 일입니다.


이근식 교수와 나성린 교수는 모두 불완전한 시장을 보완하기 위해 정부의 개입이 필요하다는 데는 기본적으로 동의했다. 하지만, 개입의 방식과 정도에 대해서는 견해 차이를 드러냈다. 증권사 빌딩들이 스카이라인을 형성한 서울 여의도 증권거래소 주위.-동아일보 자료사진

▽나=형평성을 생활권의 보장으로 확보하는 것은 적절치 않습니다. 능력 있고 노력하는 사람이 부를 창출할 수 있도록 출발점에서 균등한 기회를 갖도록 정부가 뭔가를 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우선 교육에서의 기회균등이 중요합니다. 장학금 제도를 만들고 공립학교를 증설하고, 남녀평등법이나 인종차별방지법 같은 것도 실질적으로 작동하게 만들어야 해요. 하지만 이렇게 기회를 균등하게 한 뒤에는 시장의 자유 경쟁에 맡겨야 합니다. 그렇게 경쟁을 하다가 다시 차이가 생기면, 조세나 예산정책을 통해 또 조정하고요.

▽이=저는 경제의 정상적 운용에 대해 정부의 힘을 많이 믿었던 사람이지만 최근 몇 년간 정부가 하는 것을 보니 더 이상 정부에 시장을 맡겨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도 들어요. 하지만 자유주의라고 해서 정부가 전혀 개입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사실상 언론, 정치, 집회결사 등의 자유를 인정하면 다 자유주의지요. 문제는 시장의 실패를 조정하기 위해 정부가 어느 정도까지 개입하는가를 인정하는가에 있습니다. 정부가 최대한 개입한다고 해도 북유럽이나 프랑스, 독일 정도의 선이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 선을 넘어서면 이미 자유주의가 아니니까요.

▽나=요즘 대안으로 네덜란드식 또는 덴마크식 모델을 많이 이야기하는데, 그런 모델대로 실제로 노사정 대타협이 이뤄진다면 정말 좋을 겁니다. 하지만 유럽의 경우는 오랜 민주주의의 역사 속에서 상생, 타협의 문화를 형성했고 노사정이 모두 민주의식을 갖추고 있어요. 하지만 우리의 의식수준은 아직 거기에 이르지 못합니다. 이제 정부는 ‘노사정’에서 빠져 나와 공평무사한 법과 제도를 만드는 시장적 접근방법에 주력해야 합니다.

▽이=저도 덴마크식이나 네덜란드식 모델을 한국에서 실현하는 것은 힘들 거라고 생각해요. 노사정 상층부에서 합의한 것이 밑바닥까지 실천되려면 우선 자체 내 통합과 신뢰가 있어야 하거든요. 그런데 한국의 경우는 노사정 모두 내부 신뢰가 없고 대표성도 없으니 실천되기 어렵지요.

두 사람은 시장에 일정정도 정부 개입이 필요하다는 데는 기본적으로 동의했다. 하지만 여기에는 분명한 조건이 있었다.

이 교수는 우선 정부 자체가 투명하고 합리적이어서 신뢰할 만해야 한다는 것이고, 나 교수는 시장의 실패를 교정해야 할 때나 재분배를 위해서만 정부가 최소한으로 개입해야 한다는 것. 이 교수는 국민의 기본생활권을 정부가 보장해 줘야 한다고 주장했고, 나 교수는 기회균등을 보장하는 제도만 만들고 그 뒤에는 시장에 맡기자고 제안했다.

그러나 두 사람은 한국경제 규모가 정부가 시장을 좌우할 수 있는 단계를 넘어섰다는 데는 인식을 같이 했다.

정리=김형찬기자 khc@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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