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아침에 만나는 시]고창환,“晩鐘”

  • 입력 2006년 8월 4일 03시 0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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晩鐘 - 고창환

호박엿 파는 젊은 부부

외진 길가에 손수레 세워놓고

열심히 호박엿 자른다

사는 사람 아무도 없는데

어쩌자구 자꾸 잘라내는 것일까

그을린 사내 얼굴

타다 만 저 들판 닮았다

한솥 가득 끓어올랐을 엿빛으로

어린 아내의 볼 달아오른다

잘려나간 엿처럼 지나간 세월

끈적거리며 달라붙는다

그들이 꿈꿔왔을

호박엿보다 단단한 삶의 조각들

삐걱이는 손수레 위 수북이 쌓인다

지나가는 사람 하나 없는데

그들이 잘라내는 적막한 꿈들

챙강대는 가위 소리

저녁 공기 틈새로 둥글게 퍼진다

시집 ‘발자국들이 남긴 길’(문학과지성사) 중

교회당 종소리가 울려 퍼지자, 하루 일과를 마친 부부가 경건히 기도를 올리고 있는 밀레의 ‘만종’은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는 작품이다. 실제의 종소리야 바로 그쳤겠지만 ‘그림’에 담은 종소리는 1세기가 넘도록 울려 퍼지고 있으니 이것이 바로 예술이 지닌 힘이다. 고창환의 ‘만종’에서는 원작의 오렌지빛 노을이 엿빛 노을로, 씨감자 바구니가 엿판으로, 종소리가 엿가위 소리로 바뀌었으나, 틀림없는 또 하나의 ‘만종’이다. ‘사는 사람 아무도 없는데’ 열심히 호박엿을 자르는 엿장수 부부는 어쩌면 자기들의 꿈과 희망을 위해 기도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새로운 아침을 꿈꾸는 한, 만종은 마침내 ‘새벽종’이 되어 울려 퍼질 것이다.

- 시인 반칠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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