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아침에 만나는 시]오태환 ‘늪’

  • 입력 2005년 12월 15일 03시 0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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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슬기 다슬다슬 물풀을 갉고 난 뒤

젖몽우리 생겨 젖앓이하듯 하얀 연蓮몽우리

두근두근 돋고 난 뒤

소금쟁이 한 쌍 가갸거겨 가갸거겨

순 초서草書로 물낯을 쓰고 난 뒤

아침날빛도 따라서 반짝반짝 물낯을 쓰고 난 뒤

검정물방개 뒷다리를 저어 화살촉같이 쏘고 난 뒤

그 옆에 짚오리 같은 게아재비가

아재비아재비 하며 부들 틈새에 서리고 난 뒤

물장군도 물자라도 지네들끼리

물비린내 자글자글 산란産卵하고 난 뒤

버들치도 올챙이도 요리조리 아가미

발딱이며 해찰하고 난 뒤

명주실잠자리 대롱대롱 교미交尾하고 난 뒤

해무리 환하게 걸고 해무리처럼 교미交尾하고 난 뒤

기슭어귀 물달개비 물빛 꽃잎들이

떼로 찌끌어지고 난 뒤

나전螺銓같은 풀이슬 한 방울 퐁당!

떨어져 맨하늘이 부르르르 소름끼치고 난 뒤

민숭달팽이 함초롬히 털며 긴 돌그늘, 얼핏

아주 쬐끄만, 고요가 어슴푸레 눈을 켜고 난 뒤

- 시집 ‘별빛들을 쓰다’(황금알) 중에서

‘늪’을 두려워하는 이들은 ‘늪’에 빠지지만, ‘늪’을 살아버리니 ‘늪’도 터전이 되는구나. 늪에 사는 것들이 열어젖히는 순간순간이 저리도 아름답구나. 겹동백 주워든 아기가 한 꺼풀씩 꽃잎을 떼어 나가듯 고요의 껍질을 벗기는 재미가 쏠쏠하구나. 소금쟁이뿐이랴. 물맴이 맴맴 돌고 물땡땡이 땡땡 돌고 실뱀도 길게 물실 풀며 감으며 수초 새로 스미었으리라. 이제 저 늪도 꽝꽝 얼어 고요만 남았겠지만 삼동(三冬) 속에 삼복(三伏)이 숨어 있으리라. 모든 아름다운 생명에게 끝나지 않는 ‘뒤’가 있으리라.

시인 반칠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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