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고르고 나서]때로는 느리게…

  • 입력 2002년 2월 15일 17시 17분


미국 LA에서 한번, 상파울로에서 한번, 시계바퀴를 뒤로 뒤로 두 번이나 돌리고 나서야 닿은 브라질이었습니다. 불과 몇시간 전만해도 영하의 땅에서 몸을 움츠리고 있었는데 트랩을 내릴 때 온몸에 닿는 후끈한 열기가 바야흐로 다른 시공간에 닿았다는 것을 실감케 해주었습니다. 본보 연중 기획 시리즈 ‘산과 사람’ 취재차 방문한 그곳에서 저는 취재 목적 외에 화두 하나를 붙들고 있었습니다. 다름아닌 ‘인간의 영화(榮華)’에 대해서 였습니다.

브라질은 얼마전까지 세계 4대강국으로 불리던 강대국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나라의 2002년 도시 풍경은 우리의 과거 70년대를 연상시킬 정도로 촌스럽고 부산했습니다. 역사란 흥망성쇠하는 것이지만 이렇게 한세대 안에서 성과 쇠를 확인한다는 것은 흔치 않은 일입니다. DJ정부의 복지정책에 대해 남미의 ‘포퓰리즘’을 닮았다고 목소리를 높였던 한국의 식자층들이 생각나 저는 만나는 사람마다 그들의 ‘패인(敗因)’을 묻느라 바빴습니다.

비록 짧은 시간과 경험이었지만 나름대로 제가 내린 결론은 ‘성취동기의 상실’이었습니다. 그들은 더 이상 무엇을 이뤄내야 겠다, 어떤 목표를 향해 달려가야 겠다는 원(願)이 없는 듯 했습니다. 발전이 무엇인지, 행복이 무엇인지, 삶이 무엇인지, 저는 자꾸 무겁게 그들에게 다가갔지만 그들은 너무 가벼웠습니다. 온통 축제와 축구 이야기뿐이었습니다.

곰곰 생각끝에 저는 이 나라가 우리와는 완전히 다른 환경이라는 것을 받아 들여야 했습니다. 일하지 않아도 먹고 살 수 있는 풍부한 자원과 먹거리가 있어 하시라도 맘만 먹으면 자급자족이 가능한 사회. 오직 사람하나 잘 키우는 것 밖에는 방법이 없는 우리 처지를 그들과 막바로 비교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었습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그들의 풍요는 이제 성장에 방해가 되었습니다. 지금 이 시대는 물량이 아니라 시스템으로 승부해야 하는데 게으름을 용인하는 풍요가 오히려 역사의 업그레이드에 발목을 잡고 있다고나 할까요.

하지만 저는 솔직히 그들의 여유, 느림 그리고 성취동기의 상실이 부러웠습니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 근현대사를 유격전을 치르다시피 살아 온 우리 역사, 청룡열차를 타듯 속도와 긴장속에서 살아야 하는 우리자신에 대한 무한한 연민이 피어 오르는 것도 사실이었습니다. 돌아오는 비행기안에서 10여일만에 듣는 한국말 뉴스. 일주일만 떠나 있어도 뉴스를 따라잡을 수 없는 한국사회. 아니나 다를까 부시의 ‘악의 축’ 발언으로 들썩들썩 하더군요. 숙명처럼 흡사 천형처럼 껴안고 살아야 할 내나라 내땅. 그래서인지 이번주 1면에 소개한 이 땅의 평범한 생활인 이수태씨가 들려주는 나지막한 목소리가 남다르게 들렸습니다.

설은 잘 쇠셨는지요. 지난주 ‘책의 향기’가 쉬었는데 미리 알려 드리지 못했음을 사과드립니다. 많은 분들의 문의 전화를 애정의 표현으로 감히 받아 들이며 열심히 만들 것을 약속드립니다.

허문명기자 angelhuh@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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