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동네]'최후의 분대장' 쓸쓸히 타계

  • 입력 2001년 9월 28일 17시 29분


'조선의용대 마지막 분대장'인 김학철(金學鐵)옹이 향년 85세의 나이로 지난 25일 오후3시39분 중국 지린(吉林)성 옌볜(延邊) 자택에서 타계한 사실이 뒤늦게 전해졌습니다.

옌볜공예학교 교장인 독자(獨子) 김해양(53)씨는 28일 전화 통화에서 "선친께서 지난 6월초 강연차 경남 밀양을 방문한 뒤 서울에서 종양 수술을 받고 돌아갔으나 몇 달간 경과가 좋지 않았다"고 전했습니다.김 옹은 서울의 한 병원에서 위 내시경 검사를 받던 중 식도가 파열되어 석 달간 입원후 지난 8월30일 옌볜으로 돌아갔습니다.

하지만 이 쪽 병원에서 진료기록을 제 때 넘겨주지 않아 현지 병원에서 입원치료를 받기 어려운 상태였으며, 식사가 불가능해 영양주사로 연명하던 고인 역시 미리 유서를 써 놓고 죽음을 맞을 준비를 했습니다.

평소 꼿꼿했던 성품처럼 그의 마지막은 당당했던 모양입니다. 미리 유언을 적어놓고 절대로 부음을 알리지 말라고 가족에게 당부했다 합니다. 장례식에 참석할 사람까지 최소한으로 정해서 연락하도록 했다는 군요.

미리 남긴 김 옹의 유언이 적지 않은 울림을 납깁니다. "편안하게 살려거든 불의에 외면하라. 그러나 사람답게 살려거든 그에 도전하라.”

중국에 묻히기를 거부한 고인의 유지에 따라 유가족은 27일 고인의 시신을 화장해 두만강 하류에 떠나보냈습니다. 시신을 태우고 남은 재를 평소 그가 썼던 볼펜과 조선의용군 창건 때 전우와 함께 찍은 사진과 함께 '원산 앞바다 행-김학철(홍성걸)의 고향'이라 적힌 상자에 담아서요. 홍성걸은 김 옹의 본명으로 당시 조선의용대에 입대하는 사람은 가족들이 화를 입지 않기 위해 모두 가명으로 바꾸었다고 전해집니다.

장례식에 참석한 유가족과 현지 인사 등 10여명은 고인의 뜻에 따라 유해를 떠나보내며 '조선의용군 추도가'를 불렀다고 합니다. 이 노래는 1940년대 초에 김옹이 작사하고 항일전때 전사한 전우 류신이 작곡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사나운 비바람이 치는 길가에 /다 못가고 쓰러진 너의 뜻을 / 이어서 이룰 것을 맹세하노니 / 진리의 그늘 밑에 길이길이 잠들어라 / 불멸의 영령(英靈)".

한국현대사의 산 증인인 김 옹은 파란만장한 인생 역정을 겪었습니다. 1916년 함경남도 원산에서 태어난 그는 보성고보 재학중 중국 상하이로 건너가 조선의용대에 입대했습니다. 그는 1941년 일본군과 교전중 총상으로 체포된 뒤 왼쪽 다리를 절단했으며 일본 나가사끼 형무소에서 수감 중에 해방을 맞았습니다.

1945년 단편소설 <지네>를 발표해 본격적인 창작 활동을 시작한 김 옹은 서울에서 잠시 사회주의 운동에 가담하기도 했습니다. 1946년 월북해 북한 '로동신문' 기자로 일했으나 김일성 정권에 환멸을 느껴 1950년 중국으로 망명했지요. 그러나 중국에서도 문화혁명을 비판하는 필화사건으로 10년간 옥살이와 강제노역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는 연벤에 살면서 그간 장편소설 <격정시대> <20세기의 신화> <해란강아 말하라>, 소설집 <무명소졸>, 자서전 <최후의 분대장> 등 많은 작품을 발표했고, 최근에는 '장백산' '연변일보' 현지 언론에 실었던 자전 수필을 모은 산문집 <우렁이 속 같은 세상>(창작과비평사)을 마지막으로 냈습니다. 유족으로는 부인 김혜원(75)씨와 아들 해양(53)씨가 있습니다.

<윤정훈 기자>digan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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