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해튼 프로젝트21]'도시전체가 거대한 세트'

  • 입력 2000년 8월 8일 18시 47분


고질라
뉴욕, 특히 맨해튼은 천일야화의 도시다. 수 많은 민족과 종교, 직업의 사람들이 끊임없이 마주치고 부대끼는 이곳에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신화와 전설이 도시 곳곳을 굴러다닌다. 어쩌면 그들이 만들어내는 수많은 이야기에 귀기울이기 위해 맨해튼은 ‘잠들지 않는 도시’가 됐는지도 모른다.

거리 모퉁이만 돌아서면 경찰과 갱, 예술가와 모델, 월스트리트의 ‘돈벌레 일벌레들’과 할렘의 부랑아, 외교관과 테러리스트, 유태인과 아랍인을 함께 만날 수 있는 곳. 여의도 면적의 10배가 조금 넘는 땅(81㎢)에 수백만의 운동인자들이 분열과 융합을 거듭하면서 에너지를 분출하는 곳. 이야기 사냥꾼들에게 이보다 더 훌륭한 사냥터가 또 있을까.

바로 이런 점 때문에 맨해튼은 영화와 TV드라마에 끊임없이 영감을 불어넣는 장소다. 이런 경향은 최근 더욱 가속화하고 있다.

98년 뉴욕에서 제작된 장편 상업영화는 221편으로 최대를 기록했고 10억달러에 가까운 돈이 뉴욕시에 뿌려졌다. 99년에는 209편에 8억3940만달러로 약간 주춤하긴 했지만 이 수치 역시 영화제작 편수가 폭발적으로 증가하기 시작한 94년 이후 6년을 통틀어 두 번째로 높은 것이다.

TV프로그램 쪽을 보면 ‘맨해튼의 힘’은 더욱 세다. 올해 뉴욕에서 제작되는 TV프로그램 수는 110여편으로 양적으로는 지난해와 비슷한 수준이지만 프라임타임 시간대 방영되는 프로그램은 두배 이상 늘었기 때문이다. 지난해 뉴욕을 무대로 하는 프라임타임 프로그램은 NBC의 ‘로 앤 오더(Law and Order)’, HBO의 ‘섹스 앤 더 시티(Sex and the City)’와 ‘오즈(Oz)’ 등 6편이었으나 올해는 베트 미들러 주연의 CBS 코미디 ‘베트 쇼(Bette Show)’와 가브리엘 번 주연의 ABC 시트콤 ‘매디건 멘(Madigan Men)’ 등이 더해져 13편으로 증가했다.

영화와 TV프로그램을 합치면 98년과 99년 각각 25억달러가 넘는 수입을 뉴욕에 안겨준 것으로 분석된다. 뉴욕의 ‘엔터테인먼트 르네상스’가 불어닥치기 전인 93년의 14억달러에 비하면 두배 가까운 증가율을 기록한 셈이다.

실제 제작이 뉴욕에서 이뤄지지 않더라도 뉴욕을 배경으로 하는 작품들까지 포함하면 스토리 뱅크로서 맨해튼의 위력은 더욱 실감난다. 최고의 시청률을 자랑하는 NBC의 시트콤 ‘프렌즈(Friends)’는 LA에서 제작되지만 뉴욕 여피들의 생활을 소재로 하고 있다. 파킨슨 병에 걸린 마이클 J 폭스 주연의 시트콤으로 유명한 ‘스핀 시티(Spin City)’ 역시 캐나다 토론토에서 제작되지만 내용은 뉴요커들의 이야기다. 올여름 개봉한 ‘엑스맨(X―Men)’ 도 대부분 컴퓨터그래픽으로 이뤄지긴 했지만 ‘자유의 여신상’이 초능력자들의 마지막 결투장소로 등장하는 등 역시 뉴욕이 주무대다.

이처럼 많은 영화와 TV프로그램들이 이 좁은 섬에서 출발하는 데는 ‘스토리뱅크’라는 위상 외에 또다른 이유도 숨어있다.

폭스뉴스의 국제담당 편집자인 브라이언 노블록은 “맨해튼을 포함한 뉴욕시 지역 전체 시청가구는 120만가구로 단일지역으로는 미국 최대의 시청자 시장”이라고 말한다. 엔터테인먼트 시장에서 최대수요자인 뉴요커들의 관심사를 붙들어두는 것이 시청률 제고에 매우 유리하다는 계산이다.

뉴요커들은 자신들을 ‘뉴요커’가 아닌 ‘아메리칸(미국인)’이라고 부르면 불쾌감을 느낀다는 농담이 있을 정도로 전체 미국과 자신들을 차별화해서 바라보는 자의식이 뚜렷한 것으로 유명하다. 이 때문에 뉴욕이 아닌 다른 곳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관심이 적은 뉴요커들의 관심을 끌기 위해서라도 뉴욕을 주무대로 등장시킨다는 것.

영화 ‘고질라’에서 남태평양 핵실험의 부작용으로 생겨난 고질라를 파나마운하를 가로질러 수천㎞ 북쪽 대서양변의 맨해튼까지 끌고온 것도 이런 노력의 일환이었다.

맨해튼에 사는 영화감독과 배우들이 갈수록 많아지는 것도 한 원인이다. 우디 앨런과 마틴 스콜시즈, 폴 머저스키, 스파이크 리 등의 영화감독들은 물론 팀 로빈슨과 수전 새런든 부부, 리처드 기어와 줄리아 로버츠 같은 할리우드의 유명배우들도 점차 인터네셔널한 분위기를 즐기기 위해 맨해튼에 거처를 마련하고 있다.

줄리아 로버츠의 영화제작사인 슈레이스사의 플리니 포터사장은 그들이 맨해튼에 사는 이유를 이렇게 말했다.

“집밖에 나가 한시간 거리에서 피카소의 작품을 볼 수 있고 길거리를 걷다보면 무명예술가들의 온갖 퍼포먼스를 볼 수 있다. 밤마다 열리는 파티에서는 지긋지긋한 연예계 인사들이 아니라 월스트리트 증권중개인과 그리니치빌리지의 예술가, 소호의 패션디자이너 등 온갖 종류의 사람들을 만날 수 있다. 게다가 그들 중 누구도 사인해달라고 귀찮게 구는 사람은 없다.”

<뉴욕〓권재현기자> confett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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