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릭터는 살아있다]몽실언니

  • 입력 2000년 10월 20일 20시 00분


저는 몽실이에요. 일제시대에 태어났고, 해방 후 찢어지게 가난한 어린 시절을 보내다 육이오 전쟁을 겪었고, 나이 마흔 넘어서도 시장에서 콩나물 장사를 하면서 산비탈 허름한 집에 사는, ‘대한의 딸’이죠.

우리 엄마는 아버지 밑에서 맞고 굶는데 지쳐 나를 데리고 도망나와 새로 시집을 갔어요. 그리고 그 새아버지 때문에 저는 절름발이가 됐지요. 친아버지에게 갔더니 이번에는 새엄마가 생겼는데, 동생을 낳고 돌아가시는 바람에 제가 키우다 양녀로 보냈어요.

엄마도 새아버지의 아이를 둘 남긴 채 돌아가시고, 육이오 때 포로가 됐다 간신히 도망친 아버지는 그때의 상처로, 변변히 치료도 못 받고 역시 돌아가셨어요.

얼핏 들어도 제 삶이 어처구니 없을 정도로 고단하죠? 하지만 그건 저 혼자만의 삶은 아니에요. 그 시절을 지나온 우리나라 사람 모두가 그렇게 기막힌 인생을 살았을 거예요. 권정생 아저씨는 그런 인생의 화신으로 아마 저를 만들었을 테구요. 우리가 얼마나 어렵고 서럽게 살았나 잊지 말아라, 다시는 이런 아이가 생기지 않도록 해 주어라. 이런 마음 아니었을까요?

그런데 왜 나 같은 아이가 생겼을까요? 나는 그게 다 아버지들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처자식 제대로 먹이지도 못하면서 술 취해 죽도록 때리는 친아버지, 나도 친자식처럼 사랑해주겠다며 엄마를 꼬이고는 구박하다 못해 다리 병신을 만들어 놓은 새아버지. 새엄마 제대로 못 돌봐줘 아기 낳다 죽게 만든 친아버지, 심장병 걸려 죽을 정도로 엄마 마음고생시키고, 사나운 새엄마 얻어 그쪽 동생들 고생시킨 새아버지. ‘어느 쪽이 김씨 아버지인지 어느 쪽이 정씨 아버지인지 잘 가려내지 못할’ 정도예요.

우리나라에서 그토록 세도 당당한 ‘남자’고 ‘아버지’면, 적어도 자기에게 딸린 여자와 아이들은 지켜 줘야 하는 것 아닌가요? 한집한집 그렇게 아버지들이 똑바로 책임을 졌으면 나라도 지켜질 수 있었던 것 아닐까요?

하지만 아버지들을 원망하지는 않아요. 아버지들도 얼마나 고생스럽게 사셨는데요. 저 위 어딘가에 있는 나쁜 사람이 약한 우리를 괴롭혔듯이, 아버지 안의 나쁜 마음이 가끔 착한 마음을 누르고 우리를 힘들게 하는 걸 거예요.

그러니까 문제는, 나쁜 마음이 착한 마음을 누르지 못하도록 강해지는 거겠죠. 힘으로가 아니라, 제 식으로, 온기로 강해지는 거예요. 한겨울밤, 공비 지키는 초소에서 떠는 아버지를 위해 숯불 화로를 가져간 그 마음이 여러분에게 조금이라도 전해진다면 정말 좋겠어요.

김서정(동화작가·공주영상정보대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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