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품속으로]정길연 '몸살'/대필작가의 내면묘사 탁월

  • 입력 2000년 5월 5일 20시 04분


▼'몸살' 정길연 지음/동서문학 봄호▼

정길연의 신작단편 ‘몸살’

가령, 독자 여러분이 자서전 대필자라고 생각해 보자. 실제로는 자신이 작성한 자서전이 공전의 히트를 기록한다면, 그리하여 그 자서전으로 인해 명목상의 저자가 글도 잘 쓰며 지성과 교양을 지닌 스타로 거듭난다면, 자서전 대필자인 당신의 마음은 어떠할까? 보람, 뿌듯함, 재능의 확인…. 그러나 과연 그것뿐일까?

보다 근본적으로 그 마음의 무늬는 ‘존재의 통렬한 분열’을 동반하지 않을까 싶다. 그 존재의 분열은 자신이 지닌 ‘글쓰기의 재능’이 타인의 명성을 드높이는 수단으로밖에 활용될 수 없다는 절망에서 연유한다. 글쓰는 사람에게 자신의 고유한 이름, 즉 자기정체성에 대한 갈망은 거의 본능적인 욕망이다. 바로 그 갈망과 욕망이 실제로 최저생계비에도 못 미치는 수입에도 불구하고 무수한 소설가 지망생을 낳게 만드는 주요한 모티프가 아닐까? 그렇다면, 대필작가의 경우는 어떠한가. 그들은 자신의 이름을 문학사에 남기고자 하는 불멸의 욕망을 포기하는 대신, 보다 현실적인 처세를 선택한 경우이다.

정길연의 신작단편 ‘몸살’ (동서문학 봄호)은 바로 이러한 대필작가의 미묘한 심리를 섬세하게 묘사하고 있는 수작이다. 여기 한 사람의 대필작가가 있다. 그는 어느 날 우연히 한 여자를 만나게 된다. 그녀는 자신이 십오륙 년 전에 출판사에서 일할 무렵, 거의 새로 쓰다시피 하면서 다듬었던 어설픈 소설의 명목상의 저자인 박채선이다. 그 만남은 출판사에서의 경험을 살려 아직까지도 대필작가의 삶을 영위하고 있는 주인공에게 뚜렷하게 설명할 수 없는 불편함과 존재의 찢김을 동반한다.

“내가 절대로 잊어서는 안 되는 건 결국 그 작업의 결실은 여자의 이름으로 세상에 내보여진다는 점이었다. 제대로 말하면 나는 여자의 이름으로 한 편의 자전적 소설을 쓴 셈이었다”는 주인공의 고백은 이러한 대필작가의 착잡한 내면을 인상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그 체험은 주인공에게 일종의 운명의 계기로 작용했다. 그 이후로 주인공은 본격적인 대필작가가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 박채선이 이제 주인공과 만난 자리에서 자신의 이름으로 출판된 소설들을 다 회수하고 불태워버렸다며, 자신만의 새로운 글쓰기에 대한 다짐을 말하고 있지 않은가. 그러나 주인공에게 그녀의 이러한 행동은 또 하나의 허위의식일 따름이다. 그것은 “나는 충분히 번민했으므로, 충분히 고통스러웠으므로, 양심의 굴레에서 벗어날 자격이 있다”는 것을 미묘하게 전달하는 행태인 것이다. 어느 날 우연히 만난 자리에서 글쓰기의 양심을 운위하는 박채선에게 대필 작가로서의 삶이 지닌 당당함을 내세우는 것, 바로 그것만이 주인공의 훼손된 자존심을 회복하는 길일 터이다.

이렇게 본다면, 이 소설의 새로움은 무엇보다도 ‘글쓰기의 순정성’이라는 상투적 결론을 탈피하고 있다는 사실에 있다. “강조하지만, 내 꿈과 그 꿈에 기대는 동안 감수해야 할 남루를 벗어버리자 내 삶은 눈에 띄게 풍요로워지고 달콤해졌다. 그런가… 미스 송은 자신의 이름으로 글을 쓰고 싶지 않아요? 그 여자, 박채선의 마지막 말에 나가떨어질 만큼 나는 나약하지 않다”고 말하는 주인공의 마음의 무늬는 무엇일까? 자신이 실제로 쓰지 않은 책들을 불태워버렸다는 박채선에 맞서서, 대필작가의 전문성을 끝끝내 마음에 새기고 있는 주인공의 내면은 글쓰기의 순정성에 대한 욕망도 또 다른 의미의 허영심이나 허위의식의 일종일 수 있다는 사실을 함축하고 있다. 여기서 순정성은 자신의 이름에 대한 갈망에 다름 아니다.

그러니, 어느 순간 자신의 이름을 남기려는 글쓰기의 순정한(?) 욕망과 대필작가의 전문적인 분업으로서의 글쓰기의 관계가 역전되어 버린 것이다. 그 유쾌한 역전을 바라보는 것은 고통스럽지만 의미 있는 독서 체험이다.

권성우(동덕여대 교수·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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