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이부른다]소설가 한승원의 내고향 전남

  • 입력 1999년 7월 15일 18시 44분


제 고향 전라남도에는 가슴 두근거리게 하는 낭만의 뱃길 천리가 있고, 숲그늘 속에 숨어 피어 있는 산난초꽃향기 어린 산길 칠백리가 있습니다.

성산별곡의 담양대밭과 조선의 멋진 정원 소쇄원이 있고 동백숲 무성한 여수의 오동도 거문도, 갖가지 보석으로 장식해 놓은 백도, 해돋이가 감격스러운 향일암, 정약전의 유배지였던 흑산도, 중국의 닭울음소리 들리는 가거도가 있고 꽃구슬들로 장식해놓은 홍도가 있습니다.

금강산을 축소해놓은 월출산, 내밀한 비의(秘意)를 지닌 절 운주사, 다산 정약용의 숨결이 스며있는 다산초당, 영화 ‘그 섬에 가고 싶다’의 무대가 된 평일도와 청산도, 영화 ‘서편제’ ‘축제’의 무대인 회진포와 남포가 있고 어부사시사가 들려오는 보길도, 소설 ‘천지간’과 ‘아제아제바라아제’의 무대가 된 완도 장자리의 조약돌밭이 있습니다.

그리고 산난초처럼 숨어있어 널리 알려지지 않은 유치 산골이 있습니다. 서너발쯤의 작대기 한 두 개만 있으면 이 산봉우리에서 저 산봉우리로 걸쳐놓을 수 있는 크고 작은 협곡들로만 이루어져 있는 곳으로 6·25전쟁을 전후한 슬픈 역사가 아직 숨쉬고 있습니다. 이제는 그곳의 물을 모아 목포 무안 해남 강진으로 나눠주려고 바야흐로 댐을 막고 있어 머지않아 수몰될 고장이기도 합니다.

천년의 고찰인 보림사와 산림욕을 위한 휴양림은 그 수몰지역에서 살짝 비껴 서 있습니다. 보림사는 화순 운주사에서 장보고의 청해진(완도)으로 이어지는 중간 어름에 있는 이 땅 선불교의 으뜸 절입니다. 가지산 숲속에 있는 그 절의 비로자나철불과 국보인 삼층석탑, 보물인 동부도 서부도와 사천왕상은 일품입니다. 열매가 회충에 특효약이었던 비자나무 숲 속에서 자란 녹차잎은 에밀레종소리의 신비로운 비대칭 울림같은 맛과 향을 가지고 있습니다.

휴양림은 보림에서 3㎞쯤 떨어진 협곡에 있는데 비목나무 비자나무 굴피나무 참나무 산수유나무 고로쇠나무 산벚나무의 숲이 울창하고 가는 길은 구비구비 병풍같은 구절양장을 경험하게 합니다. 여름에도 추위를 느끼게 하고 수천년 역사 속의 한스러운 영혼들이 눈 부릅뜨고 헤매는 듯한 반딧불들을 만나게 해줍니다.

향맑은 목소리로 노래하며 달려가는 시냇물을 앞에 놓아둔 채 가부좌를 틀고 있는 앙증스러운 장난감같은 통나무집들은 도시의 각박한 삶과 공해 속에서 지치고 쇠약해진 우리 몸과 마음을 편안히 쉴 수 있게 합니다. 숲의 분위기가 고즈넉하고 그윽하여 산림욕하기와 명상하기에 적합합니다.

그 통나무집에서 건너다보면 검푸른 산줄기가 동북에서 서남으로 4㎞쯤 구비돌아 흘러가는데 그 산줄기에 솟아있는 봉우리들은 기암괴석을 정교하게 쌓아놓은 듯 싶습니다. 어떤 것들은 태국 아유타야의 불그죽죽한 불탑들을 한데 집대성해 놓은 것같고, 또 어떤 것은 인도 아소카 불탑을 확대해놓은 것 같은데 그것들의 머리꽁지에는 검푸른 숲이 모자처럼 얹혀 있어 보는 사람을 이국의 정취속에 깊이 잠기게 합니다.

여기서 마음의 여유가 생기면 회진포구에 가서 낚시를 하거나 자연산 생선회를 드시고 천관산 구룡암에 오르십시오. 그곳에서 다도해의 검푸른 물너울과 점점이 떠 있는 연잎같고 물개같고 송아지같은 섬들과 이야기하고 미역냄새 나는 갯바람을 심호흡하십시오.

당신은 어떠한지 모르지만 저는 이승에서 사라진 다음 다도해의 이름없는 섬 하나, 휴양림에서 본 밤하늘의 반딧불 한 마리, 별 하나가 될 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문득 하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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