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 쓰는 선비론/이율곡]개혁이끈 「사림의 泰斗」

  • 입력 1997년 10월 21일 08시 19분


율곡 이이(栗谷 李珥·1536∼1584)는 퇴계 이황(退溪 李滉·1501∼1570)과 함께 16세기를 대표하는 사림이다. 흔히 퇴계를 영남학파, 율곡을 기호학파의 대표라 하여 경쟁관계로 오해하는 경우가 많다. 이는 영남학파와 기호학파가 각각 동인정파와 서인정파로 갈라져 정치현장에서 정쟁을 한 사실에서 비롯됐으나 실질적으로 두 사람은 학문적 보완관계였다. 퇴계가 새로운 시대사상인 성리학에 대한 굳은 신념으로 그것에 대한 완벽한 이해에 도달하였다면 율곡은 퇴계가 이룩한 학문적 성취를 토대로 당시대 조선의 상황에 맞게 재해석하여 토착화시키는데 성공했던 것이다. 퇴계가 끊임없이 사직소를 올려 간접적인 저항으로 일관하였음에 비해 율곡은 개국 이래 2백여년이 경과하면서 병폐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한 조선의 사회체제를 전면적으로 개혁하려 하였다. 퇴계를 비롯한 선학들이 일구어놓은 학문적 기초 위에서 조선성리학으로 재창조한 학문적 이상을 현실사회에 구현할 수 있다는 자신감과 사림출신의 선생에게서 배우고 사가(私家)에서 성장한 선조가 왕위에 올라 바야흐로 군주와 함께 이상사회를 건설하고자 하는 사회적 분위기가 성숙되어 있었다. 성리학적 이념으로 의식화된 사림은 전국적인 분포를 보이면서 포화상태에 이르렀다. 선조는 개혁세력으로 부상한 사림을 적극 등용하여 정계를 재편하려 하였다. 이러한 신구정치세력의 정권교체기에 율곡은 대표적인 사대부(士大夫·학자관료)로 이념집단인 사림의 정치화를 선도한 정치가이자 정치사상가였다. 「성학집요(聖學輯要)」는 그의 정치사상을 정리한 탁월한 정치서이다. 율곡의 일생은 29세까지의 성장기, 30세에서 49세로 세상을 뜰 때까지의 사환기(仕宦期·관직에 있던 시기)로 구분할 수 있다. 그의 성장기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인물은 다름아닌 어머니 신사임당(申師任堂·1504∼1551)이다. 신사임당은 율곡의 학문의 기초를 다져준 스승이기도 하였다. 16세때 어머니의 죽음으로 3년상을 치르고 19세에 금강산에 입산하였지만 장경각에 소장되어 있던 수많은 불경을 불철주야 독파하고 나서 1년만에 유학으로 복귀하였다. 이때의 불경공부는 성리학에 대한 깊은 이해에 촉매제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송나라 학자들이 미처 도달하지 못한 높은 수준으로 성리학을 끌어올리는데 기여하였다. 20세에 하산한 율곡은 23세 봄에 예안에 은거하던 퇴계를 방문하였다. 단 한번의 만남이었지만 율곡은 이후 퇴계를 선생으로 받들었고 퇴계 역시 율곡의 사람됨을 알아보고 자신의 한계를 뛰어넘을 후배로 그를 촉망하였다. 13세에 소과인 진사시에 합격하고 1564년(명종 19년) 29세에 유명한 「천도책(天道策)」으로 대과에 장원 급제할 때까지 아홉번이나 장원으로 각종 시험을 휩쓸어 구도장원공(九度壯元公)이라 일컬어졌다. 율곡은 자신의 시대를 중쇠기(中衰期·왕조의 중간 쇠퇴기)로 인식하고 대개혁의 경장(更張)이 필요하다고 역설하였다. 1574년 39세에 왕에게 올린 「만언봉사(萬言封事)」에서 「정치는 시세(時勢)를 아는 것이 중요하고 일은 실제의 일에 힘쓰는 것이 중요합니다. 정치를 하면서 시의(時宜)를 알지 못하면 정치의 효과를 거둘 수 없습니다. 시의란 때에 따라 변통(變通)하여 법을 만들어 백성을 구하는 것입니다」라고 하여 변통론을 주장하였으니 이는 시대적 상황에 적합한 제도와 법의 개정을 통해 백성의 삶의 질을 제고할 것을 역설한 것이다. 죽기 1년 전인 48세(1583년)에 선조에게 올린 「시무6조(時務六條)」에서 십만양병설을 주장하여 10여년 후의 임진왜란을 예견한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다. 그의 철학적 기초인 이기론(理氣論)은 「기발이승일도설(氣發理乘一途說)」이다. 음양동정(陰陽動靜)하는 작용인 기(氣)가 발(發)하면 그 작용의 원리인 이(理)는 거기에 탈 뿐이라는 이기일원론(理氣一元論)의 입장이었다. 따라서 이와 기는 떨어질 수 없다 하여 불상리(不相離)함을 논하면서 기의 능동성을 강조하였다. 후에 주기론(主氣論)으로 규정되는 근거가 되었는데 이러한 인식은 현실문제에 적극적인 대처능력으로 나타났다. 그가 그린 이상사회는 경쟁하고 투쟁하는 사회가 아니라 나와 남이 공존의 삶을 추구하는 유교적 이상사회, 즉 대동사회(大同社會)였다. 힘으로 다스리는 폭압적인 패도정치나 법으로 규제를 일삼는 강제적인 사회가 아니라 명분으로 국민을 설득하여 구성원들이 자발적으로 인간의 도리인 의리를 지키는 도덕국가였다. 통치자가 실천함으로써 모범을 보여 백성들을 교화하고 자율성을 제고하는 왕도정치가 궁극적인 목표였다. 대동법도 그러한 사회를 실현하기 위한 경제정책으로 구성한 것이다. 또한 향촌사회에 착한 일은 서로 권하고 잘못된 일은 서로 경계하며 어려운 일은 서로 돕자는 보통 사람들의 소박한 삶의 지침인 향약(鄕約)을 권장한 것도 대동사회의 방향성을 보여주고 있다. 그는 49년의 길지 않은 생애에 학자로서 한가지도 이루기 어려운 학문 연구와 제자 양성이라는 두가지를 모두 성취하여 많은 저서를 남겼고 16세기의 대표적인 경세가로 활동하였다. 그의 치열한 개혁의지는 기득권 세력에 의하여 좌절되었지만 이상사회에 대한 꿈은 제자들인 서인정파에 의해 계승되어 조선후기 사회에서 어느 정도 실현되었다. 율곡은 진정한 사대부로서 사명을 다하고 고단한 생을 마감하였다. 정옥자<서울대교수·국사학> ▼ 약력 ▼ △서울대 사학과 졸업 △서울대대학원 박사학위 △저서 「조선후기 문화운동사」 「조선후기 지성사」 「조선후기 역사의 이해」 「역사에세이」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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