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석 기자의 스포츠 인생극장]<23>亞경기 축구대표 코치 된 이운재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8월 1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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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튀는 공처럼 예측 어려운게 삶”… 다시 전쟁터로

일러스트레이션 서장원 기자 yankeey@donga.com
일러스트레이션 서장원 기자 yankeey@donga.com
알베르 카뮈는 축구 선수 출신이다. 17세 때 결핵으로 운동을 관두기 전까지 골키퍼로 활약했던 그는 “공은 내가 원하는 대로 오지 않았다”는 명언을 남겼다. 한국 축구에서 최고 수문장으로 이름을 날렸던 이운재(41). 그에게도 공은 늘 원하는 대로 오지 않았나 보다. 최근 경기 용인시의 한 식당에서 만난 그는 “삶은 어디서 날아올지 모르는 공과 같다. 최선을 희망하면서 최악에 대비해야 한다”며 말문을 열었다.

2012년 은퇴한 이운재는 다음 달 개막하는 인천 아시아경기 한국 축구대표팀(23세 이하)의 골키퍼 코치를 맡고 있다. 그가 한국 축구 인기가 정점을 찍었던 2002년 한일 월드컵 4강 주역이라는 사실은 굳이 설명할 필요조차 없다. 스페인과의 8강전 승부차기에서 상대 킥을 막아낸 뒤 승리를 확신한 듯 두 손을 맞잡고 환하게 웃던 장면은 아직도 생생하다.

하지만 지도자로 첫발을 내디딘 그 앞에 놓인 현실은 180도 다르다. 한국 축구가 올해 브라질 월드컵에서 16강 진출에 실패하자 그의 어깨가 더 무거워졌다. 축구대표팀은 1986년 서울 대회 이후 28년 만의 아시아경기 금메달을 노리고 있다. 이운재는 “코칭스태프와 선수가 하나가 돼 희생할 수 있어야 한다. 내가 다른 선수의 몫까지 뛴다는 헌신적인 분위기가 중요하다. 뛰어난 조연이 많아야 강한 팀이 된다. 팀이 빛나야 선수도 빛나기 마련”이라고 말했다.

한국 축구가 아시아경기에서 30년 가까이 무관에 그친 데는 ‘금메달=병역 면제’라는 사실이 선수들로 하여금 부담감에 시달리게 했기 때문이란 지적도 있다. 이운재는 2002년 부산 아시아경기에 와일드카드로 출전했다. 당시 한국은 이란과의 준결승에서 승부차기 끝에 패해 결승 진출에 실패했다. 이영표의 실축으로도 유명한 경기였다. “난 군대에서 축구했던 게 큰 전환점이 됐다. 2002년 월드컵을 앞두고 국군체육부대에서 26개월 동안 현역으로 복무하면서 내 모든 걸 축구에만 쏟아 부을 수 있었다. 후배들도 꼭 이거 아니면 안 된다는 생각에서 자유로워져야 마음껏 뛸 수 있다. 물론 아시아경기 목표는 금메달이다.”

이운재가 처음부터 골키퍼는 아니었다. 청주 청남초등학교 4학년 때 축구부원을 모집한다고 해서 부모님 몰래 동사무소에서 주민등록등본까지 끊어 가입한 뒤 중학교 때까지는 공격수나 수비수 같은 필드 플레이어였다. 골키퍼 변신은 청주상고 입학 후였다. “지구력이 너무 약했다. 운동장 10바퀴를 돌면 다른 선수들보다 2바퀴 가까이 처졌다. 공부와 담쌓고 운동만 했는데 만약 포기한다면 모든 걸 잃을 수 있었다.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183cm에 뚱뚱한 체형은 골키퍼로 그리 좋은 신체조건은 아니었지만 남다른 순발력과 예측력으로 극복했다. 요즘도 그는 빠르게 지나가는 차량 번호판이나 시내버스 노선, 순간적으로 간판에 적힌 전화번호를 읽는 버릇이 있다. 고교 때부터 시작된 것이다. “골키퍼는 상황 판단을 빨리 해야 한다. 상대 공격수의 움직임을 간파하는 데도 도움이 됐다.”

1994년 국가대표팀 간 경기(A매치)에 데뷔한 이운재는 2007년 아시아선수권대회 기간 술을 마신 사실이 드러나면서 대표팀 1년 자격 정지를 받았다. 하루아침에 국민 영웅에서 나락으로 떨어지는 참담함을 느꼈던 그는 2008년 K리그에서 골키퍼로는 사상 첫 최우수선수(MVP)에 뽑혔다. “실망시킨 팬들에게 다시 보여드릴 수 있는 건 그라운드에서 축구밖에 없다고 봤다. 명예회복은 그 다음이었다. 겨울 훈련 2∼3개월 동안 땀 많이 흘렸다. 체중이 7∼8kg 확 줄더라.”

2010년 남아공 월드컵 때는 37세의 나이로 백의종군해 비록 출전 기회는 없었어도 후배들을 이끌며 사상 첫 원정 16강 진출을 이끌었다. “경기를 뛰든 안 뛰든 태극마크를 달고 있으면 해야 할 일이 있다. 고참이라면 설령 주전이 아니더라도 후배들에게 부담감을 주거나 창피한 짓을 해선 안 된다.”

홍명보 전 대표팀 감독(135경기)에 이어 한국 선수로는 두 번째로 많은 A매치 132경기에 출전해 114실점을 한 이운재. ‘거미손’으로 이름을 날렸지만 0-5 같은 참패를 경험한 적도 있다. “대량 실점이 수비 실수였다고 동료 탓 하는 건 비겁한 변명이다. 결국 모든 책임은 골키퍼가 져야 한다. 자괴감보다는 내 문제와 잘못을 보완하는 데 집중했다.”

이운재는 학창 시절 독학으로 골키퍼의 역할을 익혀야 했다. 세월이 흘렀어도 체계적인 골키퍼 수업은 여전히 찾기 힘든 게 한국 축구의 현실이다. 이운재는 직접 팔을 걷어붙인 듯했다. 유니폼을 벗은 뒤 대한축구협회의 골키퍼 관련 코치 자격증을 모두 딴 데 이어 필드 코치 과정까지 차례로 밟고 있다. 일일레슨 같은 재능기부를 통해 어린 선수들을 가르치는 일에도 열심이다. “골키퍼는 어려서부터 기본 기술을 몸에 익혀야 한다. 그래야 응용 동작도 잘할 수 있다. 볼도 제대로 못 잡는데 무슨 다른 기술을 할 수 있겠는가. 해외 빅리그에서 활약하는 한국 골키퍼를 볼 수 있는 날을 하루라도 빨리 보고 싶다.”

인터뷰를 마무리할 무렵 이운재는 “내가 성공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기기 위해 늘 노력했다. 나를 못 이기는데 누구를 이기겠는가”라고 했다. 이주향 수원대 교수는 본보에 실린 칼럼에서 ‘문이 닫혀 아예 세상 밖으로 쫓겨났다고 느꼈을 때 카뮈가 한 일은 닫힌 문에 미련을 두지 않고 오히려 안에서 문을 꼭 닫아거는 것’이라고 썼다. 25년 가까이 푸른 잔디 위에서 골문을 걸어 잠그는 데 몰두했던 이운재. 이젠 새로운 세상의 문을 힘차게 두드리고 있다.

김종석 기자 kjs0123@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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