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드컵 칼럼/함정임]붉은 술 한 잔

  • 입력 2002년 6월 25일 18시 42분


축구가 끝나자, 붉은 꽃 깃발처럼 강가에 흔들린다. 구름 훌쩍 강 건너 보내고 자전거 페달을 밟는다. 강으로 달려간다. 문득 잊었던 노래가 흘러나온다. 날 만든 건 사랑, 날 안은 것도 사랑, 날 버린 것도 사랑. 웬 사랑 노래일까. 오호라, 그동안 축구를 지독한 애인으로 삼았었구나. 내게 기쁨을 주고, 내게 꿈을 주고, 날 춤추게 했던…. 저 멀리 방패연이 보인다. 가오리연도 보인다. 방패연도 없고 가오리연도 없는 난 붉은 꽃을 던질 것이다. 허공에 붉은 꽃 함성처럼 부서진다.

자전거를 버리고 인라인스케이트로 옮겨 탄다. 바람이 더 달려 보라고, 아예 날아 보라고 부추긴다. 나는 미친 듯이 속도에 몸을 싣고 강 이쪽과 저쪽을 질주한다. 이쪽에서 달려오는 사람, 저쪽으로 흘러가는 사람, 바라보면 눈이 맞을 것 같고, 손을 내밀면 덥석 잡힐 것 같다. 아, 당신도 그러나 그것으로 끝이다. 월드컵 분수는 여전히 맹렬하고, 해질 녘 63빌딩의 스카이라인은 가히 인공 낙원이다.

묘불가언(妙不可言). 정말 좋은 건 달리 뭐라 표현할 수 없는 것이다. 그냥 느끼면 되는 것이다. 그냥 몸 속으로 가져가면 되는 것이다. 그래서 꽃을 피우면, 붉은 꽃을 피우면 더없이 좋은 것이다. 더 이상 잃을 것이 없는 사람은 세상에서 가장 가난한 사람이거나 가장 부유한 사람이다. 우리는 축구 하나로 가장 부유한 마음 한때를 살았다. 행복하였다. 질풍노도(疾風怒濤)의 여독에 피로한 당신들께 붉은 와인 한 잔 권한다. 그리고 한 줄기 시.

‘일체의 무상한 것은 한낱 비유이니, 미칠 수 없는 것이 여기서는 이루어지고, 말할 수 없는 것이 여기서는 성취되었네. 영원히 여성적인 것이 우리를 이끌어 올린다.’(괴테 ‘파우스트’ 마지막 연, 신비의 합창)

함정임(소설가·본보 월드컵자문위원)etrelajiham@empa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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