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커스]기업홍보맨들 "기사 한줄…" PR에 피마른다

  • 입력 2002년 1월 13일 17시 34분


올해로 홍보경력 9년째인 한화그룹 홍보팀 손재우 과장(35). 오전 6시40분이면 어김없이 서울 강남구 개포동 집을 나선다. 전날 밤 마신 술로 머리가 쑤시는 날도 마찬가지다.

출근하자마자 팀원들과 함께 조간신문 시내판을 훑어본다. 회사관련 기사가 밤사이에 바뀐 게 있는지, 아침에 새로 들어간 기사는 없는지 등을 파악한다. 수많은 기사 속에서도 한화와 관련된 기사는 신기하리만큼 눈에 쏙 들어온다.

기사 스크랩이 끝나면 담당 임원인 정이만 상무 주재로 홍보팀 회의가 열린다. 그룹의 주요 이슈를 점검하면서 회사측의 대응 논리를 확실하게 익혀두는 시간. 언제, 어떤 상황에서 기자들의 질문이 나오더라도 적절하게 대응할 태세를 갖추기 위해서다.

보도자료를 만들고, 수시로 걸려오는 기자들의 질문에 답변하고, 인터넷으로 기사를 검색하다 보면 하루가 훌쩍 지난다.

오후 6시가 넘어 조간신문의 다음날짜 가판이 배달되면 바짝 신경이 곤두선다. 민감한 기사라도 실리면 밤 10시까지 대기하는 것은 기본이고 마무리 업무라도 하고 보면 밤 12시 넘어 귀가하기 일쑤다. 손 과장은 “기자들과 같은 사이클로 생활하다보니 기자들의 연락이 뜸하거나 시간이 남으면 불안해지는 ‘직업병’이 생겼다”며 웃었다.

▽애환에 젖고…〓최근 기업의 최고경영진이 고객 및 시장과의 커뮤니케이션에 신경을 쓰면서 기업과 언론을 잇는 ‘홍보맨’의 역할이 주목받고 있다.

전통적 개념의 홍보맨은 ‘피알(피할 것은 피하고 알릴 것은 알린다는 뜻)’에 머물렀다. 요즘은 반대로 언론에서 제기되는 시장의 요구를 회사로 전달하는 역할이 추가됐다. 애환이 큰 만큼 보람도 작지 않다고 홍보맨들은 말한다.

H그룹 K과장은 최근 중요발표가 있었던 때를 떠올리면 지금도 아찔하다.

보도자료를 배포한 뒤 비슷한 내용을 묻는 전화가 30번 이상 울렸다. 성의껏 답변을 하려 애썼지만 똑같은 얘기를 10회 이상 반복하자 기진맥진, 짜증까지 났다. 그는 “그때는 어디론가 사라지고 싶은 심정이었다”고 털어놓았다.

회사 이미지에 나쁜 영향을 미치거나, 꼭 부정적 기사가 아니라도 ‘예민한 문제’에 관한 기사가 실리면 홍보맨들은 아연 긴장한다. 이런 경우 홍보실은 그야말로 ‘초(超)비상상태’에 들어간다. 예전에는 평소 쌓아둔 인간관계를 활용해 그럭저럭 넘어간 적이 많았지만 요즘은 ‘안면 공세’의 약발이 무뎌졌음을 느낄 때도 적지 않다.

극비사항이 종종 언론에 먼저 보도되는 사례가 생기는 바람에 회사내 다른 부서로부터 은근히 따돌림을 당하기도 한다. 한솔의 김진만 과장은 “가능한 범위내에서 언론에 협조하려 애쓰다보니 정보가 새나갈 것을 염려한 타부서 동료들이 입조심할 때도 있다”고 귀띔했다.

▽보람에 웃고…〓한국야쿠르트 한경택 이사는 새해를 맞으면서 지난 한해 보도된 기사를 금액으로 환산해봤다. 기사가 게재된 크기와 횟수를 일간지별 광고단가에 대입시킨 결과 홍보실의 ‘순수 매출’이 10억원을 넘는다는 점을 발견하고 흐뭇해했다. 특히 작년 야쿠르트의 ‘효자 제품’이었던 ‘윌’의 성공에 홍보실의 역할이 컸다는 평가를 들으면 자부심을 느낀다.

신설 기업이나 중소 벤처기업의 홍보맨들은 자신이 만든 보도자료가 기사화되는 것 자체를 뿌듯해한다. LG홈쇼핑이 설립된 직후 당시 홍보 초년병은 회사뉴스가 신문에 실리자 “야! 내 기사 나왔다”며 흥분했다.

삼성 20여개 계열사에서 넓은 의미의 홍보업무를 담당하는 임직원은 줄잡아 300여명. 이들이 작년 말 한자리에 모인 송년회에서 삼성그룹 홍보 책임자인 이순동 부사장은 “홍보맨은 회사의 안위(安危)를 책임지는 회사의 첨병이라는 점을 인식하고 전문가로서 사명감을 가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기업 홍보의 중요성이 강조되면서 홍보담당 임원(CCO·Chief Communication Officer)이 새로운 용어로 등장했다. 임원 인사에서 ‘홍보맨이라는 이유로’ 불이익을 받는 사례도 없어졌다. 오히려 많은 기업에서 홍보업무는 ‘잘 나가는 코스’로까지 꼽힌다.

‘마당발’이나 ‘안면’으로 통하는 시대가 지났다는 인식이 확산되면서 PR기법을 전문적으로 공부하는 홍보맨도 부쩍 늘었다. LG구조조정본부 정상국 상무는 “과거에는 기업홍보가 불리한 기사를 방지하거나 일방적인 PR일변도였지만 요즘은 기업브랜드 가치를 높이기 위해 꼭 필요한 경영활동의 핵심분야가 됐다”며 “홍보맨도 공부하지 않으면 생존하기 어려운 시대가 됐다”고 말했다.

박원재기자parkwj@donga.com

하임숙기자arteme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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