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정훈의 호모부커스]전쟁과 책

  • 동아일보
  • 입력 2016년 6월 20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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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인들은 신기한 것, 다른 나라와 통교하는 것을 좋아하여 멀리 떨어진 외국과 통상하는 것을 훌륭한 일로 여깁니다. 외국 상선이 와도 사신 행차라 합니다. 교토에서는 남만 사신이 왔다고 왁자하게 전하는 소리를 거의 날마다 들을 수 있습니다.”

정유재란 때 일본으로 끌려가 3년 만인 1600년에 풀려나 귀국한 강항(姜沆·1567∼1618)이 선조 임금에게 올린 글로, 그의 ‘간양록(看羊錄)’에 실려 있다.

강항은 억류 상태에서 성리학 기반의 유교 경서 주석과 문물제도를 전하여 일본 성리학 발전에 영향을 미쳤다. ‘간양록’에는 그가 만난 일본 측 인사들과 일본 사정이 기록되어 있다. 이처럼 전란을 배경으로 탄생했거나 전쟁을 주제로 한 책이 적지 않다. 서양 고전의 앞머리 ‘일리아스’는 트로이 전쟁 이야기이며 중국의 ‘시경’에도 전란 속 백성의 현실과 심경을 담은 시가 드물지 않다.

로마의 카이사르가 갈리아에서 펼친 군사 활동을 기록한 ‘갈리아 전기’나 이순신의 ‘난중일기’는 군대를 이끈 인물이 직접 썼으며 윈스턴 처칠은 회고록 ‘제2차 세계대전’으로 1953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 임진왜란 때 조선에 온 승려 게이넨(慶念)이 전란의 참상을 기록한 ‘조선일일기(朝鮮日日記)’와 같은 종군기(從軍記)도 많다.

‘적십자의 아버지’ 앙리 뒤낭의 ‘솔페리노의 회상’은 인도주의와 평화를 향한 인류의 발걸음을 재촉하는 책이 전쟁을 계기로 탄생한 경우다. 1859년 북부 이탈리아에서 사르데냐-프랑스 동맹군과 오스트리아군이 맞선 솔페리노 전투의 부상자들을 구호한 경험이 생생하다.

“한 병사가 찢어지고 부서진 턱 밖으로 혀가 튀어나와 형체를 알아보기 힘든 상태에서 일어나려 애쓰고 있었다. 나는 깨끗한 물로 메말라 터진 입술과 굳어진 혀를 축여 주었으며 붕대 한 뭉치를 집어 양동이 물에 적신 후 물을 짜 넣어 주었다.”

수많은 책을 파괴한다는 점에서 전쟁은 책의 적이지만 많은 책을 낳기도 했다. 6·25전쟁 발발 66주년을 앞두고 생각해 보는 전쟁과 책의 비극적인 역설이다. 역사학자 김성칠이 전쟁 중 기록한 1950년 12월 3일자 일기를 다시 읽어본다.

“오늘날 이 세상에선 ‘3만지’라야만 살 수 있다는 것이다. 무슨 소린고 했더니 밖에서 보아 있는지 만지 한 마을에, 집인지 만지 한 집을 지니고, 사람인지 만지 할 정도로 처신하여야만 살아남을 수 있다는 것이다. 무자비한 좌우의 항쟁이 남긴 시골 사람에의 교훈이다.”(‘역사 앞에서’)
 
표정훈 출판평론가
#전쟁#6·25전쟁#역사학자#김성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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