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정훈의 호모부커스]책이 된 편지

  • 동아일보
  • 입력 2016년 6월 6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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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 초대 총리 자와할랄 네루는 식민지 시절 영국에 맞서다 여러 번 투옥되었다. 그는 1930년부터 3년간 감옥에서 외동딸 인디라에게 편지 196통을 써 보냈다. 단순한 편지가 아니라 고대 문명에서 20세기에 이르는 세계사였다. ‘세계사편력’으로 묶여 나와 지금도 널리 읽힌다. 편지 내용은 어린 딸의 역사의식을 키워주기에 충분했다.

“보통 사람들은 언제나 영웅일 수는 없다. 날마다 자식들 뒷바라지에 먹고살 걱정 등 여러 문제에 붙잡힌다. 그러나 때가 무르익어 대의를 세우고 그것을 확신하면 평범한 사람도 영웅이 되며, 역사는 비로소 움직이기 시작해 대전환기가 찾아온다.”

데카르트의 마지막 저서 ‘정념론’(1649년)도 편지가 낳은 책이다. 데카르트는 ‘30년 전쟁’ 중 쫓겨나 네덜란드에 머물던 보헤미아 왕녀 엘리자베스와 1642년부터 편지를 주고받았다. “생각하는 실체인 인간의 정신이 의지에 따라 행동하기 위해 어떻게 신체의 정기(精氣)를 움직일 수 있습니까?” 엘리자베스가 써 보낸 이 질문을 계기로 데카르트는 심신(心身) 관계와 정념의 문제를 더욱 깊이 고찰했다.

퇴계 이황과 고봉 기대승은 1558년 처음 만났을 때 나이가 58세와 32세였으며 고봉은 막 과거에 급제한 처지였다. 이들은 퇴계가 세상을 떠난 1570년까지 13년간 편지 100여 통을 주고받았다. 첫 8년간 주고받은 사단칠정(四端七情) 논쟁은 조선 성리학의 독자적 경지를 열었다. 이 지란지교(芝蘭之交)의 자취를 ‘퇴계와 고봉, 편지를 쓰다’(김영두 옮김)에서 만날 수 있다.

빈센트 반 고흐는 성인이 된 이후 세상 떠날 때까지 18년간 편지 700여 통을 썼다. 생전의 불우와 사후의 명성이 극명하게 엇갈리는 그의 편지는 울림이 크다. “훌륭하고 유용한 일을 성취하길 바라는 사람이라면 대중의 동의나 인정을 염두에 두거나 좇지 말아야 해. 오직 그와 공감하고 함께하려는, 마음 따뜻한 극소수만을 기대해야지.”(‘고흐의 편지1’·정진국 옮김)

e메일이 편지를 밀어냈으니 ‘책이 된 편지’는 더 이상 나오기 힘들고 e메일 내용이 책으로 나오게 될까? 이정록 시인의 경험은 e메일을 쓸 때도 여전할까? “그래 이 손으로 편지를 쓰고 우표를 붙이고 텅 빈 우체통을 하루에 몇 번씩 열곤 했지. … 내가 편지를 쓰는 순간, 세상에는 드디어 네잎클로버가 있고 미루나무 푸른 이파리가 반짝인다.”(이정록의 ‘편지봉투도 나이를 먹는다’)
 
표정훈 출판평론가
#인도 총리#자와할랄 네루#세계사편력#역사의식#정념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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