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윤석의 시간여행]‘메이데이’, 그날이 다시 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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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6년 5월 2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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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3년 5월 1일자 동아일보 기사.
1923년 5월 1일자 동아일보 기사.
‘메이데이 기념강연회가 5월 1일 오후 8시 종로 YMCA회관에서 열렸다. 2천 명이 넘는 군중이 모여들어 회장 밖까지 늘어섰다.’

한국 땅에 처음 메이데이가 상륙하여 노동제일(勞動際日)이라는 이름으로 행사를 가진 1923년 서울의 봄이었다. 메이데이의 역사와 그 의의에 대해 연사의 열변이 쏟아졌고 참석자 일동은 ‘메이데이 만세’를 부르고 행사를 마쳤다. 옥외 집회는 불허였다.

‘이날 하루 노동자가 모두 휴업하고 오전 10시에 장충단공원에 모여 노동시간 단축, 임금 증액, 실업 방지 등을 결의한 뒤 깃발을 들고 노동가를 부르며 시가 행진을 하려던 주최 측 노동연맹회의 계획은 경찰의 절대엄금 통보로 무산되었다.’(동아일보 1923년 5월 3일자)

행사 닷새 전에 종로경찰서에 불려가 경고를 받은 노동연맹회 간부는 견지동 사무실에서 기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세계 각국에서 다 하는 일인데 조선에서만 금지함은 불가하다. 가두 행진은 못하게 되었으나 야간 강연 준비나 잘 하겠다.”(동아일보 4월 28일자)

노동연맹회란 7개월 전 여러 노동단체가 연합하여 결성된 조선노동연맹회를 말한다. 지도부의 분파 대립과 파쟁을 겪으면서 한 해 뒤인 1924년 4월에 조선노농총동맹이라는 이름으로 거듭난 단체다.

그렇게 1923년 5월 1일에 개시된 노동절 기념행사는 서울 외에도 전국에서 동시다발로 벌어졌다. 양상은 대동소이했다. 이례적이라고 한다면 마산에서는 100여 명이 풍물을 울리며 시가를 일주한 뒤 노상에서 ‘노동제 날’에 관한 설명회를 갖고 나서 명태 안주를 곁들여 탁주를 마시며 기쁘게 뛰고 노래했다. 서울에서는 노동연맹회의 강연 전단 수백 장과 함께 일본에서 들여온 유인물 1000장이 경찰에 압수됐다. 일본어로 된 그 선전문은 전일본무산자동맹회가 발행한 것이었다. 일본은 식민 종주국이면서 동시에 반(反)제국주의 및 반자본주의 사상의 메카였다. 그것은 조선의 지식인 혹은 운동가에게 일본이 갖는 두 얼굴이었다. 메이데이 역시 일본을 경유한 숱한 수입품 중 하나였다.

‘오늘은 메이데이라는 5월 1일이다. 1886년 미국의 도시 노동자들이 ‘여덟 시간만 벌자! 그리고 여덟 시간은 공부를 하자! 나머지 여덟 시간은 즐겁게 휴식하자!’는 표어를 내세워 자본가 계급을 상대로 맹렬한 운동을 벌여 승리를 얻은 날이다. 1889년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제2세계 사회당동맹(제2인터내셔널) 1차 대회에서 미국 사회주의자의 발의에 따라 이날을 국제노동일로 가결한 것이다.’(동아일보 1923년 5월 1일자)

그렇게 세월이 흘러 어제도 서울을 비롯한 전국 대도시에서 메이데이 행렬이 이어졌다. 달력에도 정부의 공식 명칭도 근로자의 날이지만 민주노총은 세계노동절대회, 한국노총은 전국노동자대회라는 이름으로 각자의 기념식을 성대하게 치렀다.

북한도 메이데이를 전 세계 노동계급의 명절이라 하여 성대하게 경축한다. 온통 노동이라는 글자투성이인 나라. 노동신문, 노동당, 노농적위군…. 나흘 후에는 37년 만의 노동당대회를 갖고 3대째의 독재 체제를 확립한다고 한다.

‘아아 모처럼 돌아오려는 자유를 찾아 깃발을 날리는 메이데이/(…) 휘파람 불며 불행한 동포의 지나간 이야기를/사랑하는 우리 어린 것들에게 들려줄 메이데이를 위하여/(…) 아아 나의 눈은 핏발이 서서 감을 수가 없다.’

이 격정적 시를 임화가 광복 다음 해 5월 1일자 좌익계 신생 신문에 발표한 지도 꼭 70년이 지났다. 그 1946년의 광복 후 첫 메이데이 기념식은 대한독립노동총연맹(노총)과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전평) 양대 진영의 주최로 따로 거행되었다. 전평이 주최한 행사는 낮 12시 서울운동장 야구장에서 박헌영과 여운형의 축사가 있었고, 노총 주최의 행사는 오전 11시 서울운동장 축구장에서 김구의 선언문 낭독이 있었다. 세 사람 모두 앞서거니 뒤서거니 살해되었다. 동족의 손에. 전시 아닌 평시에.

격정시대는 그렇게 지나고 남북 분단 이후 한국에서 메이데이는 노동절로 불리다가 1960년대 제3공화국부터 근로자의 날로 바뀌었다. 그 날짜도 한국노총의 전신인 대한노동조합총연맹이 창립한 3월 10일로 하다가 1990년대 문민정부 들어 5월 1일로 바뀌었다. 명칭은 근로자의 날이 그대로 유지돼 오늘에 이른다.
 
박윤석 역사칼럼니스트·‘경성 모던타임스’ 저자
#메이데이#기념강연회#조선노동연맹회#노동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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