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세형의 기웃기웃]나는 당신에게 반하고 싶다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1월 4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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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가 바뀐다는 것은 이런 걸까? 선배들을 만나도, 친구들을 만나도, 심지어 후배들을 만나도, 언제나 빠지지 않는 이야기가 있었다. 난 요즘 ‘이럴 때’ 늙었구나 싶어.

‘이럴 때’는 너무 많았다. 걸으면서 이야기하다 너무 숨이 차다며, 우리도 늙었다, 하는 친구. 술 마시면 다음 날 출근이 너무 힘들다며, 저도 이제 늙은 거죠, 하는 후배. 여행 갔다 와서 2박 3일 잠만 잤다며, 이제 늙어서 여행도 힘들어, 하는 선배.

또한 ‘이럴 때’는 몸이 늙음을 느낄 때만도 아니었다. “거리에 어리고 예쁜 여자들, 예전엔 와 예쁘다, 했거든? 그런데 지금은 그냥 와 어리다, 싶은 게 나도 늙었나봐.” 친구의 말에 나도 모르게 고개가 끄덕여졌다. 난 요즘 TV 보면서 느껴. 웬만해선 반해지지가 않아. 드라마 속 남자 주인공들 다 멋있고 잘생겼는데, 이상하게 반해지지가 않아. “그 영화? 봤지….” 선배는 큰 한숨을 쉬며 잠시 말을 멈췄다. 흥행 성적도, 관객평도 모두 좋은 영화. 그런데 선배는 맘에 들지 않았단다. 그래서 한참 이래서 별로, 저래서 별로, 생각하다 조금 우울해졌단다. “뭐든 꼬투리만 잡혀라, 세상만사 삐딱하게만 보는, 고약한 노인네가 된 것 같더라고, 내가.” 그런데 어쩐지 나도 선배의 마음이 조금은 이해되는 기분이었다. 어쩐지 나도 요즘 재밌는 영화나 책이, 통 없어서 말이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나를 열광하게 만드는, 밤을 꼴딱 새우게 만드는, 다 보고 난 다음에도 누굴 만나든 그 얘기만 하게 되는, 그러니까 나로 하여금 반하게 만든 책이나 영화가, 요즘 통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저, 요즘 좀 없나 보다 했다. 내가 반할 만한 것들이 그저 요즘 좀 없나 보다. 그런데 문득 얼마 전 보고 온 ‘청춘’을 담은 한 사진전이 떠올랐다. 뭐가 그리 즐겁고 뭐가 그리 아픈지, 온몸으로 웃고 온몸으로 울고 있는 사진 속 인물들을 보며… 나는 그저, 그렇구나, 너희는 지금 기쁘구나 슬프구나, 이상할 만큼 감정이입이 되지 않아 무덤덤했던 기억. 갑자기 조금 무서워졌다. 내가 혹시, 늙은 게 아닐까? 몸의 늙음은 어쩔 수 없는 문제지만, 마음이 너무 많이… 늙어버린 게 아닐까?

언젠가 이런 얘길 한 적이 있다. 만약 내가 계속 무언가를 쓰면서 살게 된다면 죽을 때까지 ‘젊은 글’만 쓰고 싶다고. 그때 나는, 어른이 되고 싶지 않았다. 몸이 늙은 어른이 아니라, 마음이 늙은 어른이. 그래서 웬만한 일엔 흥분하지도 분노하지도 싸우려 하지도 않는, 좋은 말로 하면 타협을 아는, 나쁜 말로 하면 체념이 빠른, 마음이 좀처럼 뜨거워지지 않는 어른이 되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어느새 내 마음이 조금씩 딱딱하게, 차갑게, 굳어가고 있었던 건 아닐까?

또 한번 해가, 바뀌었다. 해가 바뀐다는 게 무슨 대수라고, 그저 편의상 만들어 놓은 수 체계에 불과한걸. 그래서 나이 먹는 것도 잘 모르고, 새해 다짐이나 소원 같은 것도 좀처럼 가져본 적이 없었는데, 이렇게 방심하다 내 마음이 폭삭 늙어버리면 어떡하지? 갑자기 조금 무서워졌다. 그래서 난생 처음으로 올해에는, 간절히 바라는 것이 하나 생겼다. 당신이 누구이든 무엇이든, 2014년, 나는 당신에게, 반하고 싶다.

강세형 에세이스트
#늙음#청춘#어른#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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