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상호 전문기자의 안보포커스]軍 ‘여권 불모지대’의 오명을 벗어라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3월 4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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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상호 전문기자
윤상호 전문기자
“군대에도 이 대위가 아닌 ‘미스 리’로 부르는 상관이 있었다.”, “평점이나 보직에서 보이지 않는 벽이 늘 존재했다….”

법무병과 최초의 여성 장군 출신인 이은수 변호사는 최근 동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23년간 군 생활의 애환을 이렇게 회고했다. 창군 이래 첫 여성 법무관으로 군문에 들어선 그에겐 어딜 가나 ‘여성 최초’라는 수식어가 따라다녔다. 인사 때마다 군 안팎의 관심이 쏠리면서 뜻밖의 유명세도 치렀다.

군 사법수장(고등군사법원장)에 오르기까지 그는 갖은 차별과 불이익을 겪어야 했다. 다니던 직장의 성차별이 싫어 군인의 길을 택했던 그는 또다시 ‘유리천장’과 맞닥뜨렸다고 한다.

몇 해 전 육군 소령으로 예편한 A 씨도 씁쓸한 기억이 많다. 초임장교 시절 그를 비롯한 여군들에게 회식은 그야말로 고역이었다. ‘홍일점’이라는 이유로 매번 상관의 옆자리에 앉아서 음담패설을 들으며 ‘술시중’을 들어야 했다. 술에 취해 추근대는 남군을 피해 회식 자리를 서둘러 빠져나오면 다음 날 “이래서 여자는 안 돼”라는 핀잔이 돌아왔다. 남자 동기에게 밀려 진급에서 물 먹을 때마다 자괴감이 밀려왔다.

지난해 해군 대위로 전역한 B 씨는 근무지를 옮길 때마다 성희롱을 일삼는 상관의 명단이 적힌 ‘블랙리스트’를 동료들과 주고받았다고 한다. 상관의 성희롱과 성추행을 신고하겠다는 후배를 ‘계란으로 바위 치는 격’이라며 말린 적도 많았다.

군 특유의 ‘상명하복’ 문화는 불의를 당한 여군에게 침묵을 강요하는 ‘재갈’과도 같았다. 그는 “여군의 근무여건이 많이 나아졌지만 여군을 바라보는 시선은 거의 달라진 게 없다”고 지적했다.

여군 1만 명 시대를 맞았지만 ‘남존여비(男尊女卑)’의 적폐가 일소되지 않는 한 여군은 철저히 ‘을(乙)’일 수밖에 없다는 얘기였다.

실제로 매년 급증하는 여군 대상 성범죄가 그 방증이다. 군내 성범죄는 2010년 56건에서 2013년 105건으로 2배가량으로 늘었다. 지난해에는 2010년보다 3배 정도로 증가한 것으로 추정된다. 최근 5년간 발생한 여군 피해 범죄 132건 가운데 성범죄 사건이 83건이나 된다.

이 수치도 ‘빙산의 일각’일 가능성이 높다. 대부분 2차 피해와 인사 불이익이 두려워 신고를 꺼리기 때문이다. 지난해 17사단장의 여군 성추행 사건 이후 국방부가 전체 여군을 대상으로 성범죄 피해신고를 받았지만 실제 신고는 3건에 불과했다. ‘성범죄 피해 신고=군 생활 포기각서’라는 공식은 여군들에게 공공연한 비밀이다.

더 큰 문제는 고위 지휘관까지 성범죄자로 전락하는 믿지 못할 현실이다. 현역 사단장과 여단장까지 성범죄로 사법 처리되는 지경이 되도록 사태를 방치한 군 수뇌부는 책임을 무겁게 느껴야 한다.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까. 무엇보다 피해자 보호 대책이 급선무다. 성 관련 피해를 당한 여군의 신분을 철저히 보장하고 불이익을 받지 않도록 해야 한다. 성범죄 피해 여군을 은밀하게 다른 부대로 전출한 뒤 가해자 조사를 하는 등 등 제도 개선이 시급하다. 피해 여군이 따돌림을 당하고, 죄인 취급을 받는 현 풍토에선 군내 성범죄 척결은 요원하다.

‘무관용 원칙’의 예외 없는 실천도 중요하다. 계급을 악용한 군내 성범죄는 일반 사회의 그것보다 더 악랄하고 치졸한 인권유린 행위다. 가해자는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파면과 계급강등 등 엄벌로 다스려야 한다. 군내 성범죄자는 패가망신할 정도로 처벌하겠다는 한민구 국방부 장관의 공언이 ‘공언(空言)’이 돼선 안 된다.

아울러 여군을 ‘전우’와 ‘동료’로 대하는 근본적 인식 전환도 절실하다. 여군을 군내 성소수자로 폄훼하고 ‘하사 아가씨’로 부르는 군 안팎의 문화지체 현상을 바꾸지 않고서는 ‘21세기 선진강군’ 건설은 영영 구호로 그칠 수밖에 없다.

세계경제포럼(WEF)이 지난해 발표한 ‘2014 세계 성 격차 보고서’에서 한국의 성평등 수준은 세계 142개국 가운데 117위였다, 전년보다 여섯 계단이나 떨어진 최하위권이다. ‘여권(女權) 불모국’의 불명예를 군이 앞장서서 씻어내길 기대해본다.

윤상호 전문기자 ysh1005@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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