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진호 어문기자의 말글 나들이]찌질이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11월 6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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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진호 어문기자
손진호 어문기자
우리나라만큼 욕이 발달한 나라도 드물다고 한다. 외국인은 좀처럼 이해하기 어려울 정도로 종류와 표현이 다양하다. 그래서일까. 방송 드라마엔 욕에 가까운 말이 심심찮게 등장한다.

‘왕가네 식구들’에서 나온 ‘찌질이’도 그중 하나다. 극중 아들의 친구나 오빠에게 “찌질이 왔냐” “너 같은 찌질이에게는 안 얻어먹는다”며 시도 때도 없이 사용한다. 그러다 어느샌가 그 찌질이는 욕하는 사람의 사위와 남편이 된다.

찌질이. ‘보잘것없고 변변하지 못하다’는 뜻의 ‘지질하다’의 어근 ‘지질’에 명사화 어미 ‘-이’가 붙은 ‘지질이’를 되게 발음한 것이다. ‘술 취해 옛 연인에게 전화하는 찌질남’ ‘찌질하고 찌질했던 내 스무 살의 흔적들’ 등으로 많이 쓰이지만 아직 표제어는 아니다. 의미는 계속 확장 중이다. 강자에게 약하고 약자에겐 강한 비열한 인간, 남과 잘 어울리지 못하는 외톨이, 별로 도움이 안 되는 하찮은 존재 등으로도 쓰인다.

‘찌질하다’, ‘찌질찌질’도 ‘지질하다’와 ‘지질지질’의 센말. 많은 이가 쓰고 있으나 이 역시 표제어는 아니다. ‘지지리 못난 놈’이라고 할 때 지지리 역시 지질이에서 왔다.

그런데 ‘찌라시’는 어떤가. ‘광고용 종이 전단’이 찌라시인데 일본어 ‘散らし’를 옮긴 말이다. 일본어를 한글로 옮길 때 초성은 거센소리를 쓰지 않는다는 원칙에 따라 표제어로는 ‘지라시’만이 올라있다. ‘토쿄’를 ‘도쿄’, ‘타나카’를 ‘다나카’로 쓰는 식이다. 하지만 대부분은 지라시가 아니라 찌라시라고 발음한다. 시간이 흐르며 ‘사설정보지’라는 의미도 갖게 됐다. 그래서 고려대 한국어대사전은 2009년 찌라시를 입말로 인정하고 지라시, 찌라시 둘 다 표제어로 삼았다. 지난해에 개봉한 영화 제목도 ‘찌라시: 위험한 소문’이었다.

말맛 때문에 된소리를 쓰는 사람이 늘어난 건 사실이다. 그렇다고 무슨 말이든 세게만 발음할까. 단언컨대, 아니다. ‘지질구질하다’를 보자. 지질하다와 구질구질하다가 합쳐진 말인데, 이를 찌질구질, 찌질꾸질하다고는 하지 않는다. 언중은 된소리를 즐기면서도 뜻을 구별해 쓰임새에 맞게 쓰고 있는 것이다.

사전에 없는 말이라고 해서 쓸 수 없는 것은 아니다. 찌질이는 사전이 미처 싣지 못했을 뿐이다. 다만, 찌질이는 사전에 오른다고 해서 마구 쓸 수 있는 말도 아니다. ‘애칭’이 아니라 욕으로 변했기 때문이다.

손진호 어문기자 songbak@donga.com
#찌질이#욕#된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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