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진호 어문기자의 말글 나들이]死則生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8월 28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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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진호 어문기자
손진호 어문기자
대한민국은 지금 이순신앓이 중이다. 1597년 정유재란 때 명량대첩을 다룬 영화 ‘명량’이 관객 1600만 명을 훌쩍 넘으면서 이순신 관련 문화 콘텐츠도 불티나게 팔리고 있다.

명량(鳴梁)해협. 전남 해남과 진도 사이에 있는 좁은 물길이다. 울돌목이라고도 부른다. 물길이 암초에 부딪쳐 나는 소리가 매우 커 바다가 우는 것 같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 말 그대로 물결이 세차게 흐르는 된여울이다. 이곳에서 12척의 배로 일본 함대 133척을 물리치고 바람 앞의 등불 같은 조국을 구했으니 누가 열광하지 않으랴.

영화에는 박진감 넘치는 전투 장면은 물론이고 명대사도 많이 나온다. 그중 언제 들어도 가슴 뭉클한 대사가 ‘죽고자 하면 살고, 살고자 하면 죽는다(必死則生 必生則死·필사즉생 필생즉사)’는 것이다.

장군이 전투를 앞두고 장병들에게 한 이 말은 역사가 길다. 오자병법(吳子兵法) 치병편(治兵篇)에 나오는 ‘필사즉생 행생즉사(必死則生 幸生則死)’와 맥이 닿아 있다. 오자(吳子)는 중국 전국시대(戰國時代)의 오기(吳起)를 말한다.

여기에 나오는 ‘즉(則)’을 ‘즉(卽)’으로 잘못 아는 사람들이 많다. 둘 다 ‘이제 곧’이란 뜻을 지닌 데다 ‘삶이 죽음이고 죽음이 삶(生卽死 死卽生)’이란 불교 표현에 익숙한 탓이다. 그렇다면 왜 則으로 써야만 할까. ‘죽고자 하면 살고, 살고자 하면 죽는다’는 뜻풀이에 주목하자. 여기선 ‘곧 즉’의 의미가 아니라 ‘만일 …이라면, 혹은 …한다면’의 뜻으로 쓰였다. 則은 ‘곧 즉’ 외에 ‘만일 …이라면’의 뜻도 담고 있다. 그러니 則이 맞다.

신문과 방송 역시 ‘卽’으로 잘못 쓰는 경우가 많다.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2004년)은 장군(김명민 분)이 ‘必死卽生 必生卽死’라고 쓴 글 앞에서 깊은 시름에 빠져 있는 모습을 방영했다. ‘死卽生 정신없는 여야’ 등 신문에서도 가끔 잘못된 표기가 눈에 띈다.

명량대첩, 행주(幸州)대첩 할 때의 대첩(大捷)도 의미를 살려 써야 할 말이다. 대첩은 글자 그대로 큰 승리, 대승(大勝)을 말한다. 싸우고 난 뒤에나 쓸 수 있는 말이다. 7·30 재·보선을 앞두고 ‘여야가 재·보선 대첩을 치른다’는 표현을 쓰곤 했다. 이때는 ‘재·보선 대전(大戰)을 치른다’고 해야 옳다. 결과를 모르는데 어찌 ‘대첩’이라 할 수 있겠는가.

손진호 어문기자 songbak@donga.com
#명량#대첩#사즉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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