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기자 칼럼/윤상호]국군포로 송환, 남은 시간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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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3년 4월 12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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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상호 군사전문기자
윤상호 군사전문기자
“혹시 한국에서 오셨는지….”

지난해 10월 말 미국 워싱턴 시내 한국전쟁 참전용사 기념공원. 백발이 성성한 한 미국인 노신사가 기자에게 다가와 조심스레 인사를 건넸다. 한미 연례안보협의회(SCM) 취재차 출장 온 기자라며 악수를 건네자 그는 “한국은 내 청춘을 바쳐 지켜낸 제2의 모국”이라며 손을 덥석 잡았다. 그러면서 “TV와 냉장고 등 한국산 전자제품만 쓴다. 이것도 한국제”라며 휴대전화를 꺼내 보이며 환하게 웃었다. 손에 성조기와 태극기를 들고 가슴에 무공훈장을 단 팔순이 넘은 노병(老兵)의 한국사랑은 실로 살갑고 각별했다.

그는 6·25전쟁 때 미 해병대원으로 장진호(長津湖) 전투에 참전했다고 자신을 소개했다. 1950년 12월 미국의 최정예 해병1사단은 북진 도중 함경남도 개마고원 인근 장진호에서 중공군 7개 사단에 포위됐다. 영하 30도의 혹한 속에서 전멸 위기에 처한 미 해병대는 중공군과 처절한 사투를 벌이며 흥남까지 철수작전을 벌였다. 이 과정에서 미군 2500여 명, 중공군 2만5000여 명이 각각 전사했다.

“당시 중공군에 생포됐다가 포로수용소로 이송되기 직전 간신히 탈출했죠. 함께 빠져나오지 못한 동료들의 얼굴이 아직 생생합니다.” 매달 한 번씩 기념공원을 찾는 이유도 60여 년 전 사지(死地)에 전우를 남겨둔 회한 때문이라며 그는 눈시울을 붉혔다.

그에게 “아직 북한에 생존한 국군포로도 적지 않다”고 얘기하자 “그들을 결코 잊어선 안 된다. 마지막 한 명까지 데려올 수 있도록 힘써 달라”고 당부했다. 나라를 위해 싸우다 포로가 된 장병들을 반세기 넘도록 적진에 내버려두는 건 국가의 도리가 아니라고 그는 거듭 강조했다.

하지만 선뜻 ‘그렇게 하겠다’고 약속할 수 없었다. 오랜 세월 정부의 무관심과 냉대 속에 방치된 국군포로 문제의 현주소가 넘기 힘든 커다란 벽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실제로 북한에 억류 중인 국군포로 문제는 진전의 기미가 없다. 6·25전쟁 이후 귀환하지 못한 국군포로 1만9000여 명 중 현재 북한에 생존 중인 사람은 500여 명에 불과하다. 대부분 80대의 고령인 국군포로는 강제노역 등 갖은 고초와 차별을 받고 있다고 한다. 국군포로인 아버지를 여의고 탈북한 손명화 씨(50·여)는 지난해 7월 국군포로 초청 간담회에서 “국군포로 가족이란 이유로 꿈과 행복을 빼앗긴 채 짐승처럼 살아야 했다”고 증언했다.

1994년 고 조창호 중위의 생환 이후 80여 명의 국군포로가 탈북했지만 대부분 현지 브로커와 국내 민간단체 등을 통한 ‘비공식 귀환’이었다. 정부는 국군포로를 단 한 차례도 공식 송환하지 못했다. 심지어 사선(死線)을 넘어 탈북한 국군포로가 중국 공안에 붙잡혔다 정부의 늑장 대처로 강제 북송되는 어처구니없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좌파정권 10년간 국군포로 문제는 금기시되다피시 했다. 김대중, 노무현 정부는 ‘햇볕정책’에 부담이 된다며 거론 자체를 꺼렸기 때문이다. 두 차례의 남북 정상회담에서도 국군포로 문제는 철저히 ‘논외 대상’이었다. 북한은 “강제 억류 중인 국군포로는 한 명도 없다”는 궁색한 거짓말을 반복했지만 정부는 제대로 이의조차 제기하지 않았다. 괜히 북한의 심기를 건드렸다가 남북관계에 나쁜 영향을 미친다는 이유에서였다.

이명박 정부는 국군포로 문제를 국가적 책무 이행 차원에서 해결하겠다고 했지만 천안함 폭침과 연평도 포격 도발 사건 이후 꽉 막힌 남북관계로 별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박근혜 대통령은 올 2월 초 에드 로이스 미국 하원 외교위원장 등 미 의회 대표단을 만난 자리에서 “국군포로 조기 송환 문제를 남북 대화의 중요한 의제로 다뤄 나가겠다”고 했다.

다시 한 번 실낱같은 기대와 희망을 걸어본다. 일각에선 과거 동서독의 프라이 카우프(Frei Kauf·자유를 산다) 방식처럼 북한에 돈을 주고서라도 국군포로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주장도 나온다. 탈북에 성공한 국군포로들은 “우리가 목숨을 걸고 탈북한 이유는 ‘나 아직 여기에 살아 있으니 부디 우리를 기억해 달라’는 마지막 몸부림”이라고 울분을 터뜨린다. 잊혀진 영웅들의 절규를 언제까지 방치할 것인가. 그들을 귀환시킬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윤상호 군사전문기자 ysh1005@donga.com
#국군포로#송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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