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세영의 따뜻한 동행]공부 선수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5월 16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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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래동화에는 하필이면 한겨울 딸기처럼 제철 아닌 걸 먹어야 병이 낫는 부모님을 위하여 눈 덮인 산속을 헤매는 효자의 이야기가 종종 등장한다. 그런데 요즘 부모들은 선행학습이라는 심각한 조급증을 앓고 있어서 어린 자녀들이 제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온갖 학원을 전전하게 만든다.

오랫동안 유치원 선생님을 하고 있는 여고 동창은 친구들에게 “제발 서너 살 아이들에게 글자 가르치지 말라”고 당부한다. 일곱 살쯤 되면 한두 달에 거뜬히 뗄 수 있는 한글이지만 일찍 시작하면 할수록 학습시간은 길어지고 아이는 힘에 부친다. 게다가 가장 상상력이 왕성한 서너 살에 문자라는 한정된 인식의 틀에 갇힌다는 것이다.

친한 대학교수는 하나밖에 없는 딸을 대안학교에 보냈다. 고등학생이 될 때까지 딸의 책꽂이에는 초등학교 교과서만 꽂혀 있다는 말도 했다. 속이 탈 법하련만 그는 느긋하게 “공부는 어차피 상위 10%만 하면 된다”면서 아무쪼록 딸이 고등학교만 무사히 졸업하면 대성공이라며 “허허” 웃었다.

그러나 대안학교에서도 툭 하면 아이가 말썽 부렸다는 연락이 와서 그는 수백 km를 운전해 달려가곤 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아이가 전문대학에 합격한 것이다. 노래에 소질이 있었는지 뮤지컬과에 들어갔다는 것. 그리고 졸업하더니 취직까지 했다.

“자랄 때, 제발 얌전한 사촌들 좀 닮으라고 말했거든요. 그런데 사촌들은 놀고 있는데, 오히려 사고뭉치가 야무지게 직장생활을 해서 내 딸 맞나 싶어요. 참 별일도 많지요?”

그는 복권 당첨금을 탄 사람처럼 말했다. 학교에 다닐 때는 죽어라고 공부를 안 하고 다른 길로만 도망치던 딸이 아침 일찍 출근하고 월급을 타서 저축도 하는 눈치라는 것. 10년 이상 그 아이의 성장기를 들어온 나도 믿기지 않아 어쨌든 ‘기적’이라며 함께 기뻐했다.

그런데 기적일까? 말썽꾸러기 딸은 공부에는 흥미가 없었지만 세상과 담대하게 맞서고 눈치 있게 대처하고 자기 자리를 찾아내는 능력이 있었던 것이다.

사실, 공부에도 선수가 따로 있다. 그림이나 운동이나 음악처럼 공부 역시 소질을 타고나는 것인데 부모들은 노력만 하면 1등을 할 수 있다고 착각한다. 공부는 “세상에서 공부가 제일 쉬웠어요”라고 말하는 공부 선수들이 하면 된다. 나머지는 저마다 다른 소질을 살려 행복하고 유익하게 사는 법을 공부하는 게 훨씬 현명하다.

인생은 딱 한 번뿐이다. 아무리 선행학습을 하고 남보다 더 빨리 뛰어가도 두 번 살 수는 없다. 어차피 한 번뿐인 인생에서 제 나이를 건너뛰라고 강요하는 것은 부모의 월권이다. 자녀들이 매 순간순간을 제대로 만끽하며 천천히 제 나이에 맞게 살도록 두어야 한다. 제철에 충분히 익은 과일이 가장 달고 몸에도 좋지 않은가.

윤세영 수필가
#자녀#학원#대안학교#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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