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세영의 따뜻한 동행]장항선의 추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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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3년 5월 9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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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 장항선 완행열차는 추억의 기차다.

열다섯 살까지 장항선이 지나가는 온양온천에 살았는데, 그 시절 엄마 손을 잡고 외가에 갈 때는 늘 기차를 탔다. 온양온천역에서 장항선을 타고 천안역까지 가서 경부선 완행열차로 갈아타고 소정리역 전의역을 지나 ‘전동’이라는 아주 작은 기차역에서 내렸다. 지금은 온양에서 전동이 정말 가까운 거리인데 그때 어린 나로서는 아주 먼 길이었고 게다가 전동역에 내리면 늘 밤이었다.

외가는 기차역에서 십리 길을 걸어야 하는 충남 연기군 전동면(현 세종시 전동면) 봉대리 외진 산골마을이었다. 발밑이 보이지 않는 캄캄한 밤 호젓한 산길은 엄마가 곁에 있어도 무서웠다. 또 왜 그렇게 잠은 쏟아지는지…. 반은 졸면서 걷다가 걸음이 팍팍할 때쯤 어둠을 깨고 들려오던 외삼촌의 쾌활한 목소리. “세영이 오냐?”

아마 하루 일을 마치고 허둥지둥 마중 나오는 길이었으리라. 인적 없는 밤길에 만나는 외삼촌이 얼마나 반가웠는지 모른다. 엄마에게는 거의 아들뻘 되는 젊은 총각 외삼촌은 만나자마자 내게 ‘어부바’부터 했다. 씩씩한 외삼촌의 등에 냉큼 업혀 냇물을 건너고 고개를 넘으면 세상에 무서울 것이 없었다.

가는 길에 호롱불 밝힌 원두막에서 잠시 발걸음을 멈추기도 했다. 원두막에서 참외 하나 깎아먹으며 엄마와 외삼촌은 두런두런 그간의 안부를 나누었다. 그리고 다시 외삼촌의 등에 업히면 그만 스르르 잠들어버렸다. 지금도 기억한다. 외가에 들어서면 허리 구부정한 외할머니가 버선발로 반겨주시고 외삼촌은 나를 데리고 논두렁 밭두렁에 나가 메뚜기와 방아깨비 잡아주고, 꽃도 꺾어주고, 마른 가지로 불을 지펴 콩을 구워주던 그곳.

이제 나는 어른이 되었고 외가도 서울로 이사하면서 수십 년의 세월이 흘렀다. 그 세월 속에 외할머니도 엄마도 떠나셨고, 청년 외삼촌은 노인이 되었다.

이제는 장항선이란 말만 들어도 가슴이 젖어 온다. 만나러 갈 사람은 없지만 나 혼자 장항선 열차를 타고 떠나보리라 벼르고 있다. 느리게 달리는 기차 안에서 정다운 충청도 사투리를 귓가로 듣다가 얼핏 잠이라도 들면 꿈인 양 흘낏 엄마 얼굴을 볼 수 있지 않을까. 그러나 그런 바람 때문에 아직은 장항선 완행열차를 타지 못한다. 장항선에서조차 잠시 착각으로라도 그리운 얼굴과 마주치지 못할까 두려워 미루고만 있다.

오늘, 거리에서 가슴에 카네이션을 단 노인들이 마치 그 시절 완행열차처럼 쉬엄쉬엄 느릿느릿 걷는 뒷모습을 바라보며 다시 결심했다. 그렇다. 언젠가 꼭 장항선 열차를 타고 종점까지 가보리라. 엄마와의 추억이 어린 온양온천을 지나고 신장과 도고온천을 지나 신례원 광천 장항까지…참 그립다.

윤세영 수필가
#장항선#온양온천#추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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