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236>빈 하늘에 걸린 빨랫줄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3월 24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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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 하늘에 걸린 빨랫줄
―정진규(1939∼ )

남들도 다 그런다하기 새 집 한 채를 고향에 마련할 요량으로 그림을 그려가다가 늙은 아내도 동참시켜 원하는걸 그려보라 했더니 빈 하늘에 빨랫줄 하나와 원추리랑 채송화가 피는 장독대가 있는 집이면 되었다고 했다 남들이 탐하지 않도록 눈에 뜨이지 않게만 하라고 한마디를 더 덧붙였다 실용(實用)도 끝이 있구나! 나는 놀랐다 내 텅빈 실용 때문에 텅빈을 채우려고 육십 평생을 소진했구나 아내의 실용이 바뀌었구나 눈물이 한참 났다 이제야 사람 노릇 좀 한번 하려고 실용 한번 하려고 나는 실용의 그림들을 잔뜩 그려 넣었는데 없는 실용의 실용을 아내가 터득했구나 눈에 뜨이지 않게까지 알아버리다니 다 지웠구나 나는 아직 그냥 그탕인데 마침내 일자무식(一字無識)으로 빈 하늘에 걸린 아내의 빨랫줄이여! 구름도 탁탁 물기 털어 제 몸 내다 말리는구나 염치없음이여, 조금 짐작하기 시작한 나의 일자무식도 거기 잠시끼어들었다 염치없음이여, 또다시 끼어드는 나의 일생(一生)이여 원추리 핀다 채송화 핀다


화자는 노년을 지낼 그럴싸한 시골집을 고향에 마련할 생각이다. ‘저 푸른 초원 위에/그림 같은 집을’ 어떻게 지어볼까. 꿈에 부풀어 이렇게 저렇게 집을 설계하다가, 거기 같이 살 ‘사랑하는 우리 님’ 의견도 청해보니 ‘빈 하늘에 빨랫줄 하나와 원추리랑 채송화가 피는 장독대가 있는 집’이면 된단다.

참으로 소략한 소망 아닌가! 볕 잘 드는 유리벽 너머로 푸른 들이 내다보이는 주방도 짓고, 앞뜰 나무 사이에 해먹도 걸고, 아내한테 ‘이제야 사람 노릇 한번 하려고’ 했건만. 화자는 눈물이 난단다. 미안하고 고마운 아내여. 시인의 아내로 사느라 ‘내 텅빈 실용 때문에 텅빈을 채우려고 육십 평생을 소진했구나!’ ‘텅’과 ‘빈’을 떼지 않고 ‘텅빈’이라 쓴 게 ‘텅빈(貧)’이라는 한중(韓中) 합작어 같아 재밌다. 마음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시인의 아름다운 빈처여. ‘빈 하늘에 걸린 빨랫줄’은 얼마나 정갈한 사치인가! 팽팽히 당겨진 빨랫줄의 한자 일(一) 같은 모양에서 화자는 ‘일자무식’을 연상한다. 시에서 ‘일자무식’은 ‘아는 것이 병’인, 몰라야 좋은 것, 몰라도 좋은 것에 무구하게 무식하다는 뜻일 테다. 화자는 ‘남들도 다 그런다하기’라 하고 화자의 아내는 ‘남들이 탐하지 않도록’이라 한다. 늘 한 수 위인 아내에 대한 사랑과 존경이 재기 있게 펼쳐진다.

황인숙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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