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남훈의 ‘고전에서 배우는 투자’]<21>‘나와 너’의 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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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2년 7월 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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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소 타는 사람. 동아일보DB
시소 타는 사람. 동아일보DB
‘오리진(origin)’의 붕괴는 인간관계에서도 필요하다. 관계의 오리진은 ‘나’와 ‘너’의 엄정한 분리다. 르네상스 시대 이후 시작된 개인의 발견은 이런 생각을 공고화했다. 이제 ‘나’는 하나의 소우주이며, 누구도 함부로 침해할 수 없는 사적인 존재다. 또 독립적인 인격과 자유, 권리를 가지는 존재로 인식된다. 외부에는 ‘너’라고 하는 타인이 존재한다. ‘나’와 ‘너’가 분리돼 있고 서로가 침해할 수 없는 고유의 영역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런데 산업사회는 ‘너’가 ‘그것(it)’이 되는 비참한 현실을 가져왔다. 타인은 하나의 수단이 돼 나의 이익을 위해 일하고, 사물화돼 인격을 상실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는 오늘날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또 하나의 비정상적 관계의 오리진이 됐다. 이를 붕괴하지 않으면 우리는 계속해 타인을 사물화하고 그들을 이용하며 도구화하는 비인간적인 관계를 지속할 수밖에 없다.

이스라엘의 종교 철학자 마르틴 부버(1878∼1965)가 1923년 발표한 ‘나와 너 (Ich und Du)’라는 책은 이런 관계의 오리진을 붕괴하는 단초를 제공한다. 그는 본질적으로 ‘나와 너’라는 관계 속에서 모든 것이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즉 ‘나’만 단독으로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너’ 없이는 진정한 ‘나’도 있을 수 없고, ‘너’ 역시 ‘나’ 없이 존재할 수 없다. 이처럼 사람과 사람의 관계성, 연계성을 인식하면 ‘너’를 ‘그것’으로 바라보는 도구적 관계론을 넘어설 수 있다.

어린이 놀이기구인 시소의 어원은 ‘seesaw’다. ‘보인다’라는 뜻의 동사 see와 과거형인 saw가 결합된 것이다. 내가 앉은 자리가 높아지면 ‘보이고(see)’, 상대가 높아지면 방금 전에 본 것은 ‘보였던(saw)’ 것이 된다. 누구에게도 공평하게 see와 saw가 반복된다는 점에서 인격적 관계에 대한 상징적인 의미이기도 하다. ‘나’와 ‘그것’이라는 관계를 붕괴하고 ‘나’와 ‘너’의 관계를 복원해보자. 그러면 당신과 주변 사람들의 관계 역시 새로운 형태로 발전할 수 있을 것이다.

이남훈 경제 경영 전문작가
#이남훈의 고전에서 배우는 투자#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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