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기전에 이것만은…/정이현]나이 많이 먹었을 때 ‘반듯한 서재’ 갖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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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2년 3월 7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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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레이션 최남진 namjin@donga.com
일러스트레이션 최남진 namjin@donga.com
지난 설 연휴가 시작되던 저녁이었다. 구리 아치울마을 박완서 선생님 댁에서 1주기 제사를 겸한 작은 모임이 열렸다. 가족들과, 선생님을 가까이서 뵙던 이들이 모였다. 제사를 마치고 네 따님이 정성껏 준비한 저녁식사가 뷔페식으로 차려졌다. 음식을 접시에 담아 삼삼오오 모여 앉았다. 집안 구석구석 고인이 쓰시던 손때 묻은 가구들이 그대로 놓여 있었다. 이곳에 선생님만 안 계시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1층 거실에서 2층으로 오르는 계단참에 걸터앉았는데, 누군가가 지하가 조용하니 내려가자고 했다. 생전, 여러 번 드나들었던 집인데 어쩐 일이지 지하에는 한 번도 못 가보았다. 돌아가시기 얼마 전, 지하에 새로 집필실 공사를 하셨다는 것과 한동안 깁스를 하셨던 게 그 층계에서 다치신 때문이었다는 기억이 났다.

집필실은 정갈하고 아늑했다. 사방의 벽면에는 책들이 가지런히 꽂혔고, 가장 안쪽에는 널찍한 책상이 놓였다. 책상을 손바닥으로 가만히 한 번 쓸어봤다. 방 한 구석에서 여자 소설가 셋이 밥을 먹었다. 화제가 자연스럽게 작업공간에 대한 쪽으로 흘렀다. 결혼 10년차인 S 작가는 한 달간 제주도에 홀로 머물 예정이라고 했다. 그녀의 눈빛이 반짝였다. 그녀의 숙소는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는 혼자만의 작업실이 될 터였다.

갓 결혼한 K 작가는 글을 쓰기 위해 독서실을 알아봤다고 했다. “요즘은 독서실 가격도 비싸더라”고 했다. 나도 몇 군데 전화를 걸어 물어 본 적이 있어서 알고 있던 사실이었다. 우리는 결혼한 여자 작가와 ‘나만의 방’에 대하여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박완서 선생님이 빈 의자에 앉아 우리 이야기를 듣고 계신 것 같았다.

요즘 나는 말 그대로 정신이 하나도 없는 일상을 보내는 중이다. 장편소설 한 편을 마무리해야 하고 또 한 편의 연재를 준비해야 한다. 며칠 전에는 이사도 했다. 거실만 대충 정리됐을 뿐 안방과 주방에는 포장 이사업체에서 대충 부려준 짐들이 아직 아무렇게나 쌓여 있다. 급한 마감을 하려고 방에 들어가 앉았더니 거기서 뭘 하느냐며 아이가 문을 막 두드린다. 본격적으로 일을 하려면 노트북을 싸들고 나와 커피숍을 전전하거나 식구들이 모두 잠든 밤을 이용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꼭 써야 할 원고가 있는데 정말로 책상 앞에 앉을 시간이 없어서 시작하지 못할 때의 마음, 조바심을 내며 아이를 재울 때의 마음, 그러다 까무룩 같이 잠들어버리고 깨보니 새벽 4시가 다 돼 있을 때의 마음, 그 마음들에 대해 예전에는 미처 알지 못했다. 찬물을 들이켜며 서둘러 컴퓨터 전원을 켜는, 그 새벽 4시의 고독에 대해서도 결코 몰랐다.

‘죽기 전에 꼭 하고 싶은 일’을 생각해야 하는데, ‘하지 않고 싶은 일’의 목록들만 자꾸 떠오르는 기묘한 현상은 어쩌면 요즘의 이런 내 상태와 무관하지 않을 것 같다. 나는 흔들리지 않고 싶다. 원고 마감 앞에서 아슬아슬한 초치기를 하고 싶지도 않고, 소설이 잘 안 써질 때는 일상을, 일상이 잘 안 굴러갈 때는 소설을 원망하고 싶지도 않다. 일상과 소설과 꿈 사이에서 갈피를 잡지 못하고 헤매는 이유가 ‘나만의 방’이 없기 때문이라고 투덜거리고 싶지 않고, 그래서 사랑하는 사람들을 공연히 아프게 하고 싶지 않다.

박완서 선생님은 팔순에 새 집필실을 꾸미셨다. 그것이 ‘공간’의 문제만이 아님을 이제는 알겠다. 새로운 글을 쓰겠다는 강력한 의지 없이 새로운 작업실을 만드는 작가는 아무도 없을 것이므로. 아주 나이를 많이 먹었을 때에는 그렇게 반듯한 서재를 가지게 되는 것이 나의 꿈이다. 넓을 필요는 없다. 매일 오전 9시에 책상 앞에 앉아 천천히 숨을 고르고 연필 한 자루를 깎고 싶다. 정오가 되면 혼자만의 간소한 식사를 하고 스트레칭 체조를 하고 다시 책상 앞에 앉을 것이다. 오후 6시가 되면 연필을 딱 내려놓고 일어서겠다. 나인 투 식스, 그동안에는 다만 깨끗한 몰아지경이었으면 좋겠다. 지금의 내 바람은 그것뿐이다.

정이현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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