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낙인의 법과 사회]정치교수가 넘지 말아야 할 線

  • 입력 2008년 5월 6일 03시 00분


미국 최고의 로스쿨인 예일대 법대의 고홍주(Harold) 학장은 교포 2세로서 미국 사회의 주류로 진입한 대표적 인물이다. 그는 교수로 재직 중에 빌 클린턴 정부의 인권노동 차관보도 지낸 바 있다. 하지만 그는 비판의 대상이 아니라 성공의 표상이다.

정관계에 진출한 학자를 지칭하는 정치교수(political professor)는 한국에서 폴리페서(polifessor)라는 조소적인 표현으로 약칭된다. 대중매체에 영합하는 텔레페서(telefessor)라는 신조어도 등장한다. 교수가 연구와 교육에 전념하지 않고 잿밥에만 관심이 있다는 질책이다. 권위주의 시절에 학자의 현실 참여는 곡학아세(曲學阿世)로 치부됐다. 제자들이 온몸으로 외치는 나라의 민주화에 아랑곳하지 않고, 학자로서의 양심은 저버린 채 권력에만 의탁한 어용교수에 대해 비난이 거셀 수밖에 없었다.

민주화 이후에 학자들의 현실 참여는 적극적이고 노골적이다. 대선 캠프에 참여해서 정책을 수립하고 대선 승리 이후에는 이를 구현하기 위해 국정에 참여한다. 그들의 면면과 활동상도 매우 다양하다. 첫째, 여야 구분 없이 참여한다. 야당에 참여한다고 해서 특별히 불이익을 받지도 않는다. 둘째, 전공 또한 매우 다양하다. 법 정치 경제와 같은 사회과학 분야뿐만 아니라 인문학 자연과학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학문적 배경을 갖고 있다.

학자들의 현실 참여가 일반화된 분야는 비상임위원회 위원이나 자문위원이다. 전국의 대다수 교수는 크고 작은 직책을 맡고 있다. 이 경우 본연의 직분을 견지하면서 파트타임으로 정책자문에 임하기 때문에 특별히 문제되지 않는다. 오히려 전문가의 국정 참여라는 긍정적 시각이 지배적이다.

법령상 휴직을 해야 하는 정부직, 국책연구원장, 국회의원이 논란의 표적이다. 휴직하면 그 정원(TO)은 더는 충원되지 않기 때문에 강의와 교육에 지장을 초래함으로써 학생들의 수업권을 침해할 수 있고, 정치교수는 학교에 되돌아와서도 정상적인 교수생활을 하기 어렵다는 비판이다. 반면에 산학협동이 강조되듯이 전문지식에 기초한 학문적 소신은 국정운영에 도움이 될 뿐만 아니라 현장에서의 소중한 경험은 복직 이후에 연구와 교육의 훌륭한 자산이 된다는 반론도 있다. 전문적인 역량을 갖춘 인재들의 국정 참여가 절실한 마당에 학자들이 인재풀의 가장 큰 보고라는 생각이다.

우리 사회에서 교직은 군사부일체(君師父一體) 또는 “스승의 그림자도 밟지 마라”라고 하여 존경의 대상일 뿐만 아니라 일종의 성직으로 예우된다. 어쩌면 현실 속으로 발을 내딛는 그 자체가 전통적 학자상에 대한 배신일 수도 있다.

그러나 오늘날 교수사회도 엄청나게 변화하고 있다. 평생교수만이 상아탑을 지켜왔지만, 이제 실용학문 분야에서는 현장에서 활동한 많은 인재가 대학에 영입된다. 캠퍼스에 갇힌 학자들의 좁은 눈을 보완한다는 취지다. 더구나 대학과 학문의 상징인 총장직조차도 최고경영자(CEO)형 총장이라 하여 박사학위는커녕 전혀 대학에 몸담은 적이 없는 인사들이 각광을 받는다.

아무리 세상이 변해도 대학은 지성과 이성의 상징이어야 한다. 교수들이 연구와 교육이라는 본연의 책무를 외면하고 속물화되면 대학의 미래도 없고 나라의 장래도 없다. 학자의 현실 참여는 실정법 규범을 뛰어넘는 지성계의 건전한 상식에 기초해야 한다. 대학의 건전한 작동에 장해가 돼서는 안 된다. 참여 과정에서부터 역사 앞에 겸허하게 지성인다운 절제의 미덕을 보여줘야 한다. 현실세계에서 좌고우면(左顧右眄)하지 말고 학자적 양심에 충실해야 한다. 그래야만 우리 사회가 진정으로 그들의 참여를 수용할 수 있다.

성낙인 서울대 교수·헌법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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